삶과 나/나의 이야기

추분에 인왕산 과 수성동계곡 걷기

haanbada 2023. 9. 24. 20:18

**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 , 진경산수 국립중앙박물관

**

어제가 금년 추분이었다.

여름이 예년에 비해 길었고 무더워서 난배양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한시름 놓은 기분,

추분(9.23.) 전후로 가을의 파란 하늘을 되찾은 것같아 산행을 했으면 했는데 아침에 문득

인왕산 산책과 겸사로 독립문쪽으로 하산 말고 되돌아서  수성동계곡 길을 가보자고 간단한

산책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전철역에 도착하니  10시10분 마침 객차가 들어와서 경복궁으로

몸을 실었다. 2번 출구로  나오니 아직은 경복궁 방문 관광객들이 보도에 많치않아 가볍게 걸어 

자하문 방면 7022번 시내버스를 타고 윤동주 기념관 길건너편에 내렸다.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은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문과 재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문우 정병욱과 함께 하숙하며, 인왕산에 올라 시정(詩情)을 다듬었다.

이런 연유로 종로구에서는 2012년 인왕산 자락에 방치되어 있던 '청운 수도가압장'과' 콘크리트

물 탱크'를  개조해 윤동주 문학관을 만든 것이다.

가압장은 상수도의 약한 수압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는 세상사에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을 맑고 강하게 깨워주며, 영혼의 물길을 정비해

새롭게 흐르도록 한다.  윤동주 문학관은 우리 영혼의 가압장인 샘이다.

 

 

윤동주 기념관 건물 옆으로 난 길로 올라오면 낮은 언덕 위 왼편에  운동주의 서시가

암각된 기념석이 보이고 남쪽으로 남산 타워가 보인다.

1941년 정병욱과 함께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 연희전문학교'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44년 송몽규와 함께 징역 2년형을 언도 받고 후쿠오카형무소 이송되었으며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다.

1948년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제목으로 정음사에서 시집 출간했다.

 

장안연우  1741년  겸재  경교명승첩   간송미술관

 

연무(煙霧)가 낮게 드리워 산 위에서는 먼 경치가 모두 보이는 그런 날이었던 모양으로,

남산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멀리는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 등의 연봉들이 아련히 이어진다.

겸재가 전반의 생을 보냈던 북악산 서쪽 산자락과 후반의 생을 산 인왕산 동쪽 산자락이

마주치며 이루어 놓은 장동(壯洞)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눈앞에 깔면서 나머지 부분들은

연하(煙霞)에 잠기게 하여 시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꿈속의 도시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 서울 장안의 진경이다.

 

 

언덕에서 내려와 차도를 건너 조금 내려간 다음 다시 차도를 횡단 등산로 길을 조금 올라 가면

산성 돌담이 보이며 산성 돌담길을 오른편에 끼고 계속 올라가면(도보로 약 40분) 정상에 다다른다.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 위로 기차바위 능선과 절벽이 보인다.

 

창의문과 기차바위능선    정선

 

 

경복궁

돌담길을 올라가다 보면 왼편으로 빠지는 소롯길 끝에 넙적 바위나 전망대가 있어

한양산성 내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기차바위언덕과 그 너머 북한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도중 뒤돌아 보면 북쪽으로 기차바위 능선과 멀리 북한산 인수봉이 보인다.

 

마지막 오르막 계단길

 

사진에 보이는 계단을 오르고 조금만 더 경사가 덜한 길을 걷고 오른쪽으로 돌면 인왕산 정상이다.

 

인왕산 정상

 

 

사직단이나 독립문쪽으로 하산하지 않고(내려가는 길이 멀고 다리에 부담을 많이 준다.) 유턴하여 되돌아 간다.

 

 

자세히 보면 많은 등산객들이 기차바위 능선 경사면의 화강암 넙적바위 위에  드러누어 가을 바람과 풍치를 즐긴다.

 

 

하산길에 첫번째 만나는 샛길(수성동계곡 하산길)로 내려 가는 것이 앞으로 만날 밑 쪽 샛길 보다 좋다.

내려가다 보면 화강암 넙적바위가 두 군데 있어  여러명이 앉아 점심 간식먹기도 좋다.

다시 차길을 건너가서 조금 더 우측 인왕산 둘레길을 가다보면 왼편으로 밑의 무무대전망대가 나온다.

뜻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아름다운 것만 있을 뿐' 이다.

 

무무대 전망대

 

수성동계곡은 왼쪽 이래로

 

 

 

겸제 정선의  수성동 계곡 그림

 

장동팔경 속의 '수성동'은 수성동 계곡의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부감하여 그린 것이다.

전면 가까운 곳의 입구와 골짜기는 급히 시선을 내려다보고 그렸고, 원경은 바위산은 평원의 시선으로

처리하였다.

두 가지 시선의 교차 효과로 그림 속의 사물의 모습이나 시선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역동적인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표현 방식은 바위들을 덩어리 같이 뭉텅뭉텅하게 표현한 것이다. 

굵은 선과 번짐을 이용하여 대략 그린 듯하지만 골짜기의 세세한 굴곡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자칫 멍청하게 그려 무덤덤하기 쉬운 바위산의 모습에 생명을 불어넣어 기운생동을 느끼게 하는 화가

정선만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묘사는 곡선을 주로 사용한 것인데, 사물도 길도 모두 곡선을 사용하였다.

처음 올라올 때의 길을 이어 앞으로 펼쳐질 오르막길을 S자 형식으로 처리하여 계속 둥그런 길이 이어져

그림 속에 자연스런 율동감을 만들어낸다. 매우 감각적이면서도 생생한 솜씨이다.

 

 

 

비해당 집터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은 정치적 야심을 가진 형 수양대군에게 맞서

어린 조카 단종을 위해 목숨까지 걸며 신의를 지킨 왕자였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그는 이곳 수성동 계곡에 '비해당(匪懈堂)'이라는 별장을 짓고 살며

시와 그림을 즐겼다고 한다.

'게으름 없이'라는 뜻의 비해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인 '숙야비해 이사일인'에서 따온 말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 없이 한 사람을 섬기라는 의미이다.

 

단종 즉위 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다툼을 벌였으나 계유정난으로 희생당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큰형은 문종이고 둘째 형이 세조이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다.

1452년 단종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 김종서 등 문신·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었으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안평대군도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귀양지에서 죽었다.

 

안평대군의 이름은 '이용' 호는 비해당, 매죽헌이다.

서예와 그림에 능하고 안목도 매우 깊었다.

아래 그림 '몽유도원도'는 비해당이 화백 안견을 시켜 그린 그림으로 당시 이런 그림을

그리거나 그리게 하는 것은 역모를 의심케하는 행위로 간주될 소지가 많았다.

 

안견 몽유도원도  세종29년 1447년 일본 덴리대학 소장

 

 

수성동계곡 입구에 있는 마을버스 9번을 타고 내려가 경복궁 입구에 내리면 서촌 먹거리 식당골목이 보인다.

왼편으로 황단보도를 건너면 경복궁으로 갈 수 있고 더해서 궁 입장료를 면제받으려면  한복을 빌려 입고 입장하면 된다.

 

 

먹거리 시장 안쪽 식당가

인왕산 정상과 수성동계곡에서 충분히 풍치를 즐기고 내려와  이 골목이나 길 건너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고난 후  경복궁 관람이 한나절에 충분하다.  한복대여는 길건 후 보면 점포가 꽤 있다.

12시30분경에 도착했으니 주변에서 점심먹고 경복궁관람에 두 시간 걸린다고 보면 오후 3 ~ 4시면

인왕산 정상 과 수성동계곡 산책하고 경복궁 관람을 충분히 할 수 있었겠다. ^-^

 

          이               상

 

 

 

**

2023.9.24.  한바다.

'삶과 나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다 보면  (1) 2023.10.28
가을의 향기  (0) 2023.10.28
어린왕자  (0) 2023.08.30
제주한란에 대해  (1) 2023.08.14
자전거 일반에 붙여  (0) 2023.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