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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란에 붙여
세계적으로 한란은 한국과 일본 남부, 중국 남부 등 동북아시아 일부에 분포되어
있는 식물로 일본의 규슈· 시코쿠· 혼슈· 쓰시마섬, 타이완의 화롄, 중국의 동남부
저장성· 푸젠성 그리고 동남아시아 태국 북부와 베트남 북부까지 자생한다.
한국은 제주도와 전라도 남부 일대와 남해 주변 섬에 자생하고 있다.
제주도의 한란 자생지는 한라산 남쪽으로 난 계곡 능선의 남면 경사지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서귀포시 일원과 남제주군 그리고 북제주군의
일부 지역이다.
동쪽은 표선면 토산리에서 서쪽 안덕면 서광리에 이르는 한라산 남쪽 계곡의 경사면까지
해발 70~840m의 상록수림지대로 특히 '시오름· 선돌· 돈네코' 부근에 집중 분포되고 있다.
동쪽의 분포 한계는 북제주군 구좌읍과 동쪽 끝 경계지역까지이며 완만한 경사지이다.
서쪽 한계는 서귀포시 중문동과 남제주군 안덕면의 경계 부근이지만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은 역시 서귀포시 일원으로 서쪽으로 도순천과 동쪽으로 신예리 하천 사이 지역이다.
분포 고도의 범위는 해발 120m 부근의 자생지가 가장 낮고 가장 높은 곳은 한라산 정상을
중심으로 정남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영천천(돈네코) 상류 840m 지점이다.
상효동 자생지는 약 39ha로 돈네코계곡을 따라 띠상으로 존재한다.
이 지역은 1962~2013년까지 조사에 의하면 평균기온 16.3°C , 연평균 강수량은 1,844mm,
토양 평균온도 16.5°C, 토양습도 37.3% 였고 낙엽층은 평균 4.5cm 두께인 난·온대림 지대이다.
서귀포에 비해서는 서늘하고 습한 자생지 환경으로 한란 자생지 환경에 매우 적합한 상태였다.
일부는 곰솔 나무 밑에 대부분은 구실잣밤나무 아래 분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한란자생지는 하천변의 좌우 언덕부위에 자리잡고 있으나 여름철 직사광선을 받지
않고 나무 그늘로 시원하며 겨울철에도 직사광선에 의한 난초잎이 받는 일교차가 비교적 적다.
하천의 좌우측 어깨부분 수림대와 초지의 경계부에 풍속이 완만한 미풍이 흘러 자생지에 위치한
개체들의 생육이 왕성하고 건강한 개체들이 자생하고 있음이 조사됐다.
최근 조사된(2015) 자생지 현황은
한란이 많이 분포된 지역 : 해발 250~600m, 평균기온 15.4°C 토양온도 13.2°C ,습도 85%
자생지의 광도는 400~ 1,800Lux 산성토양(PH4.1~5.3)이었다.
꽃은 10월~ 2월인 늦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6송이부터 ~ 18송이 까지도 피는 게 관찰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생지에는 토층 표면의 진흙 속에서 근경이 자라고 있다가 7월과
8월경의 장마기간 중이나 또는 장마가 끝나자마자 지상으로 새 촉이 출현되며
제주에서는 이 시기에 한란의 유묘를 채취한다.
새 촉을 채취하고 나면 근경은 그대로 남아 있다가 난균의 도움으로 땅속에서
근경이 계속자라며 이듬해 다시 새 싹을 틔운다.
제주한란은 잎의 너비葉幅에 따라서 광엽종廣葉種, 보통종普通種, 세엽종細葉種으로
구분되고 잎의 길이葉長에 따라서는 장엽종長葉種, 보통종, 단엽종短葉種 등으로
구분된다.
한란의 뿌리는 일반식물들의 뿌리 구조와는 달리 털뿌리가 없고 곁뿌리側根이 발생하지
않으며 굵고 매끈한 유백색의 뿌리가 곧게 자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뿌리의 끝부분에는 근관부根冠部가 있으며 이 부위에서 세포의 분열이 이루어지며 생육이
왕성하게 이루어 질 때에는 투명한 색채를 띄고 끝이 뾰족한 상태지만 생육이 정지된 근관부는
갈색 또는 백색을 띄우고 끝이 뭉툭한 상태로 남아있다.
한란의 근경은 보통 지표면으로부터 20㎝ 以內의 표층부에 분포돼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땅속 깊이 뻗어 들어간 경우에는 지하 50cm 정도의 깊이까지도 분포되어 있는 것도 관찰할
수가 있다.
제주한란은
단일 식물 종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1967년 7월 11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191호로 지정,
보호되기 시작했으며, 돈내코 계곡에 있는 한란군 락지 40필지 389,879㎡는
지난 2002년 2월 2일 천연기념물 제432호로 ‘제주 상효동 한란 자생지’로 지정됐다.
서귀포시는 지난 1981년 서귀포시 개청과 함께 돈내코 한란 자생지에 보호철책을 설치,
관리를 시작했는데 서귀포 자연휴양림 내 한란 자생지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도순천계곡 주변산림지 ; 이곳은 깊이 들어갈수록 짙은 숲, 높은 암궤와 폭포들이 장엄함을
볼 수 있는 계곡으로 한라산 영실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도순천은 서귀포 연남동, 도순동,
하원동으로 흐르고 대천동에서 강정천과 합류하여 바다로 흐르는 13km 구간 하천계곡이다.
영천천계곡 주변산림지 : 효돈천을 말하며 ‘신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에서는 영천천이라고
표기되어있다. 계곡이 깊고 넓어서 다양한 식생이 서식하고 있다.
한라산 남사면의 최대 하수천으로 길이는 약 13km로 한라산 방애오름과 미악산 상부로
이어져 하효동과 남원읍 하례리 경계지점에 있는 ‘쇠또각’에 이르러 해안으로 유입된다.
이 계곡 유역에 하효, 토평, 법호, 하레마을 등 9개 마을에 산재하고 있다.
돈네코계곡 주변 산림지 : 효돈천의 중상류로 해발 약 400m 지역에 물이 항시 흐르는 계곡이
있는데 이곳의 원앙폭포 주변은 원래 원주민들이 여름이면 찾는 피서지 중 최고였다.
서귀포 상효동 1513번지 자연휴양림 지대.
서귀포시는 지속적인 보호 관리를 위해 1999년 한란 생태계 학술조사 용역을 시행하여
총 사업비 83억을 투자 한란 관리 계획을 수립 자생지 추진 사업을 하기 위해
2001년도부터 토지 매입을 시작 2006년도까지 22필지 64,648㎡를 매입했다.
1996년도부터 2007년도 까지는 집중 자생지 4,366㎡에 산책로 220m, 보호책 1,700m를 설치,
무인경비 시스템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란이 잦은 도채로부터 안전한 보호가 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3천여 촉 정도가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시는 지난 2008년도 부터 제주한란 생태 체험 및 전시관, 주차장 등을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돈내코를 찾는 관광객들과 시민들이 직접 한란을 감상할 수 있도록 자생지 내 연면적1,440㎡
택지에 지상1층, 지하1층 규모의 제주한란 전시관을 공사비 60억원을 투자 2014년 개관했다..
제주한란 전시관 = 서귀포시 돈네코 67번길19 064-710-6862
* 한란전시관과 자생지 관람데크
대지면적 9,224㎡ 연면적 1,440㎡ 건축면적 487㎡ 2014. 11.14 개관
* 돈네코 한란 자생지
한란 기록사
난 재배의 역사는 중국이 가장 길어 3천년의 난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 고대의 난, 즉 향등골나물은 서기전 8세기까지는 한(蕑)이라고 불렸는데
그 잎 모양이 마란(馬蘭)과 비슷하다는 데서 난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향등골나물은 잎과 꽃에서 강한 향기를 풍기는 향초로서 액을 쫓는 데 쓰였으며,
꽃을 꺾어서 구애의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또한 더운 물에 넣어서 목욕을 하기도 하고, 가공하여 음식물에 첨가하거나
향합에 넣어서 옷에 차기도 하였다.
이 식물이 군자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덕이 청결한 군자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향초를 패용하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
동양문화에서 난蘭은 사군자의 하나로, 시詩, 서書, 화畵에 빠지지 않는 중요한
소재이자 지조의 상징으로 본다.
유가儒家의 시조인 공자(551~479)는 난을 매우 사랑하고 높게 평가하여 후일 많은
유학자儒學者들이 난을 군자, 지조, 우애의 상징으로 여기는데 크게 기여했다.
공자가 ‘주역周易’을 해석한 계사전에 보면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끓고,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고 하였다
당나라 말기 양기楊虁는 '식란설植蘭設'에서
난초와 창포를 심어보니 웬일인지 무성해지지 않는다. 묘원 관리인을 따라
씻기고 물을 주니 깨끗해졌다. 난초와 창포는 여러 화초와 다른 면이 있다.
싹이 금방 시들고 뿌리도 썩어 들어간다.
그리고 곽탁郭槖은 그의 '종수서種樹書에서
난초와 혜란은 습기를 싫어한다. 물을 바로 뿌려주는 것은 피해야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난초 재배는 당나라 때에 이미 성행한 것이 아닌지.
중국 송나라에 이르면 난초재배는 금전거래 상 큰 이익이 됐고 난초에 관한
전문서적이 출현한다.
남송의 조시경趙時庚이 지은 ‘금장란보(金漳蘭譜, 1233년)’이 최초이며 14년 뒤,
왕귀학王貴學의 ‘왕씨란보(王氏蘭譜, 1247년)가 출간한 것 등이 최초의 것으로
‘왕씨란보’는 출간은 늦었지만 ‘금장란보’에 비해 풍부하면서 도심도 깊은 내용에
유학에 기반한 해설로 더 높이 평가한다.
북송의 뛰어난 산곡도인 황정견黃庭堅(1045~1105)은 그의 ‘수죽기(脩竹記)’에서
“한줄기에 꽃 한송이가 피고 향기가 많은 것은 난이고,
한 줄기에 예닐곱송이가 피면서 향기가 적은 것은 혜蕙이다.”라고 했고
'서유방정'에서는 난초와 혜란은 뭉쳐나는데 모래땅에 잘 자라며 영양분이 모이면
꽃을 피우는 것은 둘이 같지만 한 줄기에 하나의 꽃을 피우며 향이 진한 것이
난이라하고 한 줄기에 5~7개의 꽃을 피우며 향이 좀 모자란 것이 혜다. 라고 했다.
중국 송시대에 이르러 이처럼 난의 종류와 재배 상의 상식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 이미 난 재배가 널리 보급된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무렵 문인묵개들이 흔히 즐기는 묵란도 등장하기 시작하여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난재배도 다른 문물과 마찬가지로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보는데 그 시기는
고려 중엽으로 알려져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난초 재배는 사대부 취미생활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13년(1431년) 유효통, 노중대 등이 편찬한 ‘햔약집성방’은 난초의 종류와 식물적
특성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일연 전견명(1206~1289)의 ‘삼국유사’에 가락국기의 수로왕이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그 일행을 맞이할 때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로 만든 술을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 식물을 우리 나라 사람이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기로 추정된다.
고려 중기의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시 ‘임진유감(臨津有感)’에
秋風溺溺水洋洋(추강닉닉수양양)
廻首長空思渺茫(회수장공사묘망)
恨恨美人隔千里(한한미인격천리)
江邊蘭芷爲誰香(강변난지위수향)
가을 바람 산들산들 강물은 넘실넘실
고개 돌려 하늘 보니 생각 아득하여라.
쓸쓸하다, 나의 임 멀리 떨어졌으니
강가의 난초는 누구 위한 향기이뇨.
고려 말의 문신 난파 이거인李居仁(?∼1402 태종2년)은 난을 재배한 것으로 유명하고,
조선 초의 강희안姜希顔은 우리 나라 자생란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강희안은 안사형安士亨과 더불어 화목에 대한 안목이 탁월하였던 사람으로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난을 심자深紫 · 담자淡紫 · 진홍 · 담홍 · 황란 · 백란 ·
벽란 · 녹란 · 어타魚鮀 · 금전金錢 등으로 분류하고 중국의 옛 기록을 소개하면서
재배법을 논하였는데 내용은 남송 진원량의 백과사전 형식의 ‘사림광기’를 인용하고 있다.
선조 34년(1551) 김상헌(1570~1652)의 ‘남사록’에 정의현(서귀포)의 난 자생지로
서홍리와 호근리를 언급하고 있고,
1775년 영조 때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신경준申景濬(1721~1781)의 유고집 ‘여암유고’에
“우리나라에는 제주에만 유일하게 혜가 있다(我國 濟州獨有蕙)”라는 언급도 있다.
정조 때 풍석 서유구(1764~1845) 가 쓴 백과사전 격인 ‘임원경제지’에서는 난을 자류 17종,
백류 24종, 잡류 14종 등 모두 55종으로 분류하였고 우리 나라 자생란에 대한 것과
대마도를 통하여 중국 · 일본의 난이 수입되는 경로 등을 밝혔다고 한다.
제주한란 어제와 오늘 (수난사)
1930년대 한반도를 일본이 강점한 시대로 제주산 난이 어떻게 채란되어 일본에 밀반출
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본인이 80년대초에 난에 관심을 갖고 서울시에 거주하시는 연노하신 분들이 추축이된
난회(주로 혜란 취급)에 가입하였다.
당시 활동하는 기간 중 얼핏 들은 이야기가 최근에 와서 보니 거의 사실인 것 같다.
당시 한성에는 일본인이 주축인 난인회로 ‘한성난회’, ‘계림난만회’가 있었다.
그 중 활동이 활발했던 ‘계림난만회’는 제주산 한란 채란에 비밀히 열중한 모양이다.
84명의 회원 중 한인(장택상, 이모)은 2명으로 32년~39년간 회원 중에 목포항~제주항을
운항하는 여객선을 이용, 한성 ~ 제주간을 왕복하였는데 숙소는 자생지인 서귀포에 있던
‘장춘여관’에 머무르면서 간접적으로 원주민들을 이용하여 채란시켜 구입했다.
원주민 산채꾼 중 ‘임대보’씨의 이름도 적재되어 나온다.
채란을 위한 일당에 들인 삯이 당시 소를 대리고 밭갈이 하는 비용의 2배를 주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이 자주 찾은 유명 자생지가 서귀포 서홍리, 동홍리, 돈네코, 중문천이 였다.
어쩌든 1939년 까지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현지에서 구입하거니 산채해서 한성까지
갖고오게 했던 것 같다.
1936년 열린 ‘미나카이 난초 전람회’에서 상하이산 백화한란 1분에 2원에 팔렸다고 했는데
쌀 한 가마니 가격이 1원 50전~2원이고 보면 수입산 평범한 한란 백화 한분이 꽤나
비쌌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제주도 산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유명 난인 고하라에이치로(小原榮次郞)가 1937년 일본에서 출간한 난화보집 하권에
조선 제주도에 한란과 소란이 분포한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던 것도 이 때였다.
제주한란 이야기는 가람 이병기선생의 일기(1939.3.13.)에도 나오는데; “16:00에 문일평씨,
이병도씨와 함께 죽림정 방응모씨 집에 갔는데 한용은, 이중화, 이훈구 등이 나와 있었다.”
라고 적혀있다.
1940년도에는 관계자들에게는 소문이 파다했다는데, 일본 난인들이 제주한란을 가마니로
6가마 이상 구주지방으로 옮겨 다 심었다고 한다.
이 곳이 시모노세키시(下關市) 맞은편 바다건너 북규수 모자(北九州 門司)이다.
사실 당시 교역 항로는 부산 대마도가 아니라 부산 시모노세끼였다.
모자는 당시 다사, 대사, 토좌 등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토좌한란의 시초가 아닌가 생각한다.
1950년대에 제주한란 도외 도출로 인한 2차 한란 수난사가 있었다.
1989년 ‘난과 생활’ 8월호에 일본 난계의 원로인 ‘고나미’씨의 증언이 기재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계속그 잡지를 봐왔었는데 보고 모와 두었던 난잡지인 ‘난과 생활’, ‘’난세계‘들을
이사하고 옮기기도 비교적 무거운 것 같아 한 박스 처분해버려서 지금은 찾아 볼 수는 없다.
대신에 가람선생(1891~1968)의 일기에 보면 1954년에 우박사의 소개로 제주한란 100촉을
갖고 온 제주 청년을 만났는 기록이 있는데 촉당 가격이 100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부산지역 땅값이 평당 20원이었다니 꽤나 비싼 가격에 도출 거래되었다고 본다.
더해서 1982년도에 제주시 한밭난원 사장이 선물로 준 산채한 한란 발브 덩어리(녹두알 같은
어린 발브 5개)를 배양한 이야기를 하고싶다.
몇해 지난 후 개화되어서 ’난과 생활' 잡지에 개화 사진과 인연에 대해 기고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초에는 8년간 인터넷포탈 사이트 ‘ 난사모’를 4인과 함께 운영한 적이있었다.
지인들에게 특별히 귀한 선물로 사계란 처럼 연중 개화하는 제주한란을 분양해 주겠다
해도 거의 모두가 사양해서 속으로 황망한 적이 많았다.
난하면 춘란이지 , 배양 경험도 없구 키워봐야 돈도 않되는 한란이라서 그런지(?)
주겠다는 성의도 무시 당해서 재배를 접을까도, 당시 배란다 한편은 양란 재배에 배당해서,
생각했다. 사실 한란은 춘란과도 양란(반다, 팔레높시스,카틀레야 등)과도 함께 월동하기에
힘이 들었다. 간이시설만 갖고서는.
그러나 지금은 희귀한 제주산 건란이라는 사실에 그간 처분해 버리지 않고 마지못해 재배한
보람이 좀 있기도 하다.
집에서 배양하고 있는 제주건란 가칭 '난주'이다
올 해도 3분 모두 7월 8월에 절화 후에 다시 개화해서 두번째 꽃이다.
끝으로 제주한란 명품 '미당'을 소개하며 마치고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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