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나/미술 관련

단원 풍속도첩

haanbada 2023. 2. 4.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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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원 풍속화첩 ]

 

 들어가며

 

풍속화란 원래 동시대의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상을 묘사하고 기록하는 예술로 주로 지배

계급층 보다는 피지배충의 생활을 주로 다루지만 이 계층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배계층의

생활도 자연스레 포함되기도 한다. 

  단원이 남긴 풍속화에는 대개 병풍과 '단원풍속도첩'처럼 첩이 형태로 되어 있있다.

총 25점으로 된 시리즈형 풍속도첩인 단원풍속도첩은 보물 제527호로 지정되어 이촌에

위치한 중앙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첩의 크기는 가로 세로 27cm x 22.7cm 이다.

  여기에는 총 16점을 올렸는 데 그림을 감상하는 분들의 감상을 돕기 위해 몇가지 관상

포인트를 적어 본다.

 

 -. 작품 "서당", "무동"에서와 같이 판소리 장단처럼 형태가 다른 선의 굵고, 가늘어지기

    그리고 짧게 끊어질 듯 길기 이어지고, 색의 농담으로 다양하게 묘서되는 음율같은

    선들의 율동을 보자.

 -. 작품 "씨름"에서 처럼 윤곽선과 면의 채색을 의도적으로 일치시키지 않는 채색법으로

    경계선을 따라 색이 번지는 윤곽선 불일치 기법을 사용하는 것 보기

 -. 사건현장의 기자처럼 사실적이면서도 재미있게 인물과 표정을 표현해 마치 숨소리까지

    들리게하는 풍경인 작품 "주막"에서 보여 주는 사실감

 -. 작품 "벼타작" "빨래터"에서 보여주는 한 순간을 포착하여 사실감 넘치치는 묘사능력

    너머 숨어 있는 해학적이면서 풍지가 번뜩임을 찾아보자.

 

 

[자화상]

김홍도( 1745년 ~1806년? )

   1917년 오세창이 편찬하고 , 1928년 계명구락부에 의해 간행된 우리나라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에 김홍도의 본관이 김해라고 적혀있으나 현전하는 김해 김씨 족보에  그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 혹시  관명이거나 예명일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그의 육촌 형제가 태(兌)자 돌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김해에서 만호를 지낸 진창의 손자인 석무의 아들로 태어나면서 화원 집안의 천부적 재질을

물려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말기에 이창현이 지은 성씨계보책인 '성원록'에는 그의 5대조가 당시 수문장(종6품)을

 지낸 김득남이라고 나와있다고도 한다.   

   20대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으며, 28세 때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어진과

 왕세자의 초상도 그렸다 ,  이듬해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했다 

1781년 정조어진 익선관본도사의 동참화사로 활약했으며 ,  이 무렵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라  자신의 호를 "단원"이라 지었다고 한다.

  1791년에 다시 어용화사로 선발되어 정조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그 해 가을 겨울 충청북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 정월까지 봉직하게되나 그해 충청감사

이형원의 상계로 파직되는 불운을 겪는다.

  연풍현감 자리는 종6품으로 중인계급으로 최고의 직책이었다.       

 파직 후인 1796년에 나온 '병진년 화첩"에

 들어 있는 그림 ''삼공불환도"를 이 풍속도첩의 말미 그림으로 올려 봤다.

  단원은 조선의 삼원삼재에 속하는 풍속화가요, 인문적 산수 인물화가요, 실경산수화가 이다.

삼원이라면 단원을 포함해 혜원 신윤복(1758~1813), 오원 장승업(1843~1897)과

어깨를 나란이 하고 풍속화면에서는 현재 심사정(1707~1769), 관아재 조영석(1686~1761),

그리고 공재 윤두서(1668~1715)를 잇고 있으며 조선 풍속화를 집대성한 화가라 할 수있겠다.

  단원를 화가의 길로 이끈 당대의 최고 문인화가인 강세황과 당시 자신이 서예가이며

화가인 예인군주 정조대왕은  단원이 그린 조선 풍속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개혁군왕인 정조는 1776년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을 궁중에 설치하고 검서청을 예하에 두어

이덕무, 유득공 등 유능한 선비를 배출했고,

 백성들의 생활상과 정서를 그림으로 궁중에서 알아 볼 수 있게 치정 7년해인 

1783년에는 6조 중 예조 예하에 있던 도화서를 개편하고 왕의 직속 부서인 규장각에 유능한

화원 10명을 자비대령화원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1. 서당

[서당]

  

    이 그림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짓는다면 육십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분들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 때에는 놀기도 바쁜데  숙제도 많았다, 국어 교과서에 한자가 토없이도 버젓이 나올 정도였다.

  재미있게도 이 그림의  주인공은 회초리를 맞고 돌아앉아 훌적거리는 학동같은데 아니라는 것

  우선 구도를 보면 원형구도인데 원근법이 아니라 부감법을 쓰고 있다. 

  서안 뒤에 앉아 안스러운 표정을 감추지못하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있는 사방관을 쓴 훈장님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학동 4명,  왼쪽에는  학생이 5명이 앉아 있다. 

   그런데 그림을 보면

  상황은 끝난 것이 아니고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왼쪽에 앉아 있는 학생 중에는 관례를 치러 갓을 쓴 나이가 좀 있는 학동 포함해 4명의 얼굴이

  보이는 표정은 아주 고소하다고 입벌리고 웃는 반 오른쪽에 앉은 3명은 뭔가 하면

  동료 의식이 있어 어쩔수 없어 미소로 참고 있으면서도, 은근슬쩍  훈장 앞 아동에게 뭔가를 

  일러주고있다,  맨위 학동은 손으로 목소리를 낮추며, 중간 학동은 연신 책을 뒤지며

  답을 찾고 있으며, 밑쪽 학동은 책을 펴 , 슬며시 답을 보여 주고 있고 ,

  벌받는 학동은 오른눈으로 살짝  보고 있는 느낌이 온다.

    조선의 문예부흥기 정점은 영.정조 치정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두 큰 전란도 치른지 오래됐고 영농기술도 획기적으로 향상되 백성들의 생활도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아  이전부터 조금씩  양반이 아닌 평민의 자녀들도 서당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농업에서 얻은 자본으로 상업도 크게 발달되어 사회적 분위기가 중인 거부들로 하여금

  서당에   관심과 투자를 하게된 결과이다.

    당시 서당의 교육수준은 대개 한문을 읽는 독해능력 배양과 한문을 지을 수 있는 작문능력 ,

  그리고 글씨 쓰기가 주류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같은 서당을 다니는 어린 학동들 사이에도 양반과 상민이라는 계급사회 분위가

  엄연히 영향을  미쳐  아이들 마져도 두 폐로 갈라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씨름

   

  이 작품은 단원의 그린 풍속화  중 대표적 적푼으로 봐도 손색이 없는 그림이다.

척 보면 긴박한 순간에 남아 있는 힘을 다해 엑스터시를 느끼기 위해 마지막 용을 쓰는

느낌이 팍 온다.

 그림의 구도를 살펴보면 원형 안 공간에 다이아몬드를 세워논 구도로 안정감 속에 긴장감을 준다

물론 부감법으로 그려져 씨름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잘 그려져 있다.

   들배지기는 씨름에서 한판승을 주는 멋진 기술이다. 지금 한창 겨루고 있는 두 선수

중 앞쪽 선수가  들배지기로 걸어 기합소리와 함께 턱에 힘을 주며 오른발을 축으로

상대편 선수를 뒤로 넘기려고 힘컷  상대방 선수를 들고 있고, 반면 뒷쪽 선수는 되지기를 하려고

용을 쓰고 있지만 낭페한 표정이 역역하다.

  그리고 양 선수들 상투 윗쪽에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갓을 쓴 젊은 선비는 어디서 많이 봤던 양반이다.

금남지역인 빨래터 바위 뒤에 몸을 가리고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냇가 주변 빨래하는

여인들을 흠쳐보던  그 젊은이를 그대로 옮긴 것 같다. 이유는 상상이 된다.

 상투를 하고 비교적 젊잖은 분들이 앉아 있는 그림의 왼편 윗쪽에 갓을 벗어 포개놓고

신발까지 벗은 채 무릅을 세우고 앉아 있는 양반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선수같이 보인다.

  그리고 시선을  이 양반이 앉은 자리에서 조금 위 오른쪽으로  선을 그으면 벙거지를

벗어놓고 옆으로  드러누워  선수들의  씨름기술을 탐색하던 힘께나 쓸 젊은이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다. 

다 알았다는  의미인가.

  한편 씨름에 내기를 걸어놓고 선수를 응원하던 구경꾼들 중 그림의 오른쪽 아래편 두 사람을 보자

 어른과 함께 오른쪽 더펄머리 소년은 긴장되어 입을 벌려 탄성을 지르고 있는 반면 ,

승부를 직감했는지   장 탄식을 하며 오른팔을 뒤로 내밀어 땅을 짚고 뒤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어른의 손을 자세히 보면 팔 끝에 이상하게도 오른손이 그려져 있다. 일부로 그렇게 했을까?

   한편 단원의 풍속화에 약방에 감초처럼 나타나는 주인공이 여기에도 등장한다.

 왼편 끝 중앙에 어딘가를 바라보고 서 있는 엿장수 총각이다.  지금 씨름장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상태로 , 긴장감, 놀람, 탄식 등  승패의 갈림길에 선 긴박한 순간인데도 ,

씨름결과는 이미 파악했는지  아니면 누가 이겨도 관심이 없는지 , 하기사 , 엿판을 보니 거의 다 팔려

이번 시합이 끝나면 내기에 이긴  사람들이 다 팔아 줄 것 같기도 하다. 

엿가락도 몇개 남아 있지가 않다. 슬부에는 관심을 접어서 일까 ? 

 소년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미소가 ,오늘 장사가 좋았는지 어린 나이에도 불구 그 만의 넘치는

여유가  씨름판과는 대조적으로 더욱 돗보이게 한다.

   끝으로 씨름선수들의 복장을 보면 요즘 씨름과 다르게 샅바를 매지않고 있음이 보인다.

 즉 왼쪽 허벅다리에만 바를 감고 있다는 것 , 이런 유형을 바씨름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씨름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오른씨름, 왼씨름, 띠씨름, 바씨름이 그 것으로 

오늘날  행해지는  씨름은 왼씨름으로, ' 대한씨름협회'에서

오늘날 모든 씨름을 왼씨름 하나로 통일했다고 한다.

 

 

3. 무동

[무동]

  

   이 그림은 악사들의 흥겨운 연주 소리와 무동을  춤추게 하는악사의 추임새가

들리는 듯하고, 다음 동작이 상상이 되는 생동감 넘치는 모습들이 보인다.

춤추는 무동은 나이는 어린 것같으나 동작과 얼굴 표정에서 자신감이 넘친다. 

왼 발을 땅에 딛고 오른발은 살짝 들어 가벼운 몸동작을 보여주고, 왼 손은 목 뒤로

살짝 젖히고 오른손은 살짝 구부린 상태로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춤의 절정에 달한

몸 동작과 자신감 넘치는 얼굴 표정이 참으로 잘 드러나 있다.

 무등의 춤사위를 보면 신명나게 뒤로 적힌 두팔 , 왼쪽으로 휘날리는 어깨위에 두른 띠,

가쁜히 날아 오른듯한 오른발은 지금 절정의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흔들리는 옷맵시를 다양하게 묘사해 주는 것은 선들의 움직임으로 ,

마치 판소리의 음율형태로  장단과 고저 여림과 힘참 등이 변화가 붓으로 선의 길고 짧음 ,

가늘어지고 굵어짐, 선명했다가 흐려지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일정치 않은 다양한 선

묘사로 그려져 있다.  

   구도는 원형이지만 각 모서리에서 x-자로 긋은 끝 지점에 앉은 악사들 , 

벙거지를 쓴 북잡이. 볼이 붉게 물들게 힘을 주어 피리를 부는 사내.

해금을 켜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는 갓을 쓴 대금부는 사내 등 얼굴이

전부 보이는 세명의 악사가 눈에 띈다.

  삼현육각은 조선시대 향악의 전형적인 악기 편성법의 하나인데 육잡이가 필요하다.  

보통은 좌고 1, 장구 1, 피리 2, 대금 1, 해금 1로 편성되는 데,

여기서는 향피리 2, 젓대 1, 해금 1, 북 1, 장구 1로 구성되어 있다.

악사들의 특징은 입고 있는 의상이 전부 다르디는 것,

즉, 갓을 쓴 악사가 3명에  벙거지를 쓴 악사가 3명으로

전부 정장을 입고는 있으나  머릿수를 맞춘 급조한 팀으로 보인다.

벙거지를 쓴 3명을 빼고  3명은 갓을 쓰고 있으니 양반 신분일 것일 것이고,

연주를 감상하고 있는 분들은 양반이고 보면 최소한 예의 표시는 된 것 같다.

 

 

4. 타작

[타작]

   

    이 그림은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 설명이 있으면 감상하는데 더욱 공감이 갈 것같다.

단원의 풍속화는 해학과 풍자가 그림 속에 풍부하게 녹아 들어가 있어 서다.

    관객의 시선으로 봐  x-자 구도의 오른쪽 윗쪽에서 좌측 하단으로

내리 긋는 사선 상에 풍자를 그 사선과 교차되어 개상을 따라 내려와 무릅 꿁고 볏단 매고

있는농부를 가로지르는 사선에 해학을 심어 놓았다.   

    갑과 을로 나뉘어 진  사회체제는 작금에도 큰 변함이 없지만 양반계급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제도 하에서 중인 측에도 못끼는 일반백성의 삶이란 피폐되지만 않으면

다행인 것이 었다.

그래도 곡간에서 인심난다고 수확의 계절은 모두가 땀의 결실을 그나마 맛보는 기간이었다.

   우선, 두 사선이 교차되는 지점에 놓인 긴 나무둥치(개상)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영.정조 치정 때는 농사방법도 많이 개선되어 벼의 단위 당 벼생산량이 두배 이상 늘었다 한다, 

처리할 양의 증가하면 당연히 농기구도

개량되 었을 텐데 변함없는 개상을 그렸다는 것, 그리고 마름( 중인처럼 지주를 대신 영농 감독,

소작료 받기, 등의 일을 한다)의 형색을 을 보면 , 낮술 한잔 걸치고 긴 장죽을 빨며,

볏가리 위에 돗자리를 깔고 흐트러진 자세로 자빠져 있지만 ,

 마름의 벗어논 신발이 놓인 상태을 보면 무언가  평상적인 것과는 다른 점읗 발견할 수가 있다.

그 벗어 논 신발에서 마름의 현재 심상이 읽을 수가 있지 않을 까 ?

  사선상의 왼쪽 맨 아래 구석 쪽에 흐트려지며 날린 알곡 낱알들을 빗질로 모으고 있는

노인의 표정을 보라,  

 한창 추수의 기쁨으로 밝고 활기찬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세상을 달관한 모습으로 빗질하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 조선시대의 주간 산업인 농업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들의 경우,  

그 인구의 70% 정도가  소작인으로 ,경기도를 제외하면,  

소출의 50%를 지주에게 바치고,  나라에 세금도 내고 , 씨앗 구입 등 부대비용을 제하고

나면 그해 추수한 것의  1/3 분량 정도로

 익년 일년을 식구들 먹여야 하니 편히 쉴 시간이 없었응을 것이다.

  농민에게 수확하는 시간은 기쁨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국가에 바칠 세금과 지주에게 바칠

소작료로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고통의 시간이도 했다.

 나락을 터는 소작농의 입장은 타작할 때 벼이삭이 덜 털려야 나중에 볕단 속에 남아붙어 있는

떡고물인 낱알들을  건질 수가 있었겠고, 감독관입네 하고 폼을 잡고 비스듬이 누어 있지만

윗 양반네가 부르면 맵싸게 달려갈 수  있도록 신발을 벗고는

굳이 신발 코의 방향을 밖으로 돌려 놓았다. 

  끝으로 달관한 모습으로 그린 , 빗질 노인 윗쪽 편에  나락 터는 개상 주위 사람들과 달리

잔쯕 찌뿌린 젊은이가  보인다, 가슴을 풀어헤치고 뚱한 표정으로 볕단을 내려치는

이 젊은이를 보면 나이가 꽤 찬 것 같은 데 아직 상투를 올리지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즉 노총각이란 말이다.  왼쪽에 낮술을 먹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마름과 사이에

뭔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새 같기도 하다.   

노인은 그동안 겪었던 화가가 그림 이면에 보이고져 하는 사연을 이미 모두 알고 있다고

표정으로 대변하고 있다.

 

[주막]

5. 주막

  

     이 그림은 단원의 다른 퐁속화에서는 보기 힘든 싸리울타리가 화면 배경 일부로 그려져있다.

  초가지붕마루, 부뚜막(솥을 걸 수있도록 아궁이 위에 흙과 돌로 쌓은 턱)

  가장자리에 있는 것을 포함 총 3개의 나무기둥까지 굳이 그린 이유는

  그림에 긴장감을 주는 좌측 위에서 오른쪽 밑으로 흐르는 사선구도에  힘을 싣기 위함 같다. 

    그래서인지 '주막'은 단원의 다른 풍속화에서 보여지는 무심한 주인공이 그려져있지 않아 ,

  여유로움 보다는  바쁜 나날을 보내는 서민들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주인공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선, 보채는 어린아이와 술독에서 술을 퍼내는

 술구기를 든채,  밥값을 계산 하는 행상에 눈길을 주는 주모,  

  무엇이 그리 바쁜지 담배 한 대 필 여유도 없이 곰방대를 입에 문채 셈을

  치르기 위해 쌈지를 열고  밥값을 계산하는 노총각,  괴나리봇짐도 이미 등에 지고 있다.

  그 옆에는 더 바쁜듯 허리를 숙이고 숟가락으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는

 중년 사내도 보인다.

 부뚜막 바닥에 놓인 술잔은 누구의 것일까?

  마지막 밥 한 술 뜨는 중년 사내의  흡족한 얼굴 표정과  쌈지를 열고 있는

봇짐 맨 노총각의 표정을 읽어보자.

 

[우물가]

 

6. 우물가

  

      고려가요 <쌍화점>이다

  

 "  드레우물에 물을 길러 가고 신댄    /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여이다

    이 말씀이  이 우물밖에 나명들명  /  조그마한 두레박이 네 말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데 같이 덤거츠니 없다.            "

     ( 우물가에서 용(남자 상징)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는 데 본 사람은 두레박뿐이다)  

 

    우물가에서 정분이 난 이야기 중에는 고려태조 왕건이나 조선태조 이성계 이야기가 유명하다.

  지금도 물이 좋다면 괜찮은 여인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생명의 잉태에 필요불가결한 물은 샘터에나

  우물가에 가야 만날 수 있었다.  공중전화가 없던 시절 이 곳에 가면 소식을 전해듣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다. 지금의 카페나 미장원 이발소 같은 곳이라 할까.

     이 그림은 사선구도로, 감상의 시작점인 오른쪽 윗쪽의 보다는 중심이 왼쪽으로 내려와 있다.

  사선 왼쪽 밑 부분에 위치한 큰 중심원 구도 주위를 따라 작은 원으로 인물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작은 원들이 많다, 즉 큰 원인 우물에, 두레박, 갓, 물동이가 그것으로, 모난 것이 없다

    눈길이 가는 데로 살펴보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염치없어 보이는 한량이 중심이 된다.

  무과에 합격한 한량들이 입는 철릭을 입었으나 저고리도 없이 앞섬을 풀어 헤쳤다.  게다가 갓도

  벗어 철릭에 매단 불량스런 모습인데 어찌보면 연출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 친구 서넛이 주막에서 낮술을 걸치고 지나가다가 예쁜 여인이 물가에서 물긷고 있는 모습을

  보곤 ,밑져야 본전 물얻어 먹기 내기를 한 모양인데,  속마음은  여인에게 수작을 걸어보고 푼 마음이

  보인다 채신머리 없는 수염에 음흉한 미소가 그 것이다.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신호는, 두레박을 건넨 수줍은 미소의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모습에서 온다.

  애써 사내의 음흉한 눈빛을 외면하는 듯 고개를 외로 틀고 눈을 내리 깔고 있지만  여인의 품세를 보면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몸의 중심이 한량쪽으로 쏠려 왼발과 심장은 남자쪽으로  얼굴과 오른발은 반대로

  향해했다.  한량의 상반신을 보면 듬직한 상체에 목없이 머리가 바로 붙어있어 남성을 상징한다, 

  즉, 몸은 이미 남자에게 관심갔지만 마은은 아니다는 탁월한 심리적 묘사가 숨겨져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선은 무심한 듯 물을 퍼올리는 왼쪽 끝 여인에게로 간다. 궁금하다 ,

  고개를 숙여 물을 퍼 올리지만 살짝 숙인 고개가 웃통이 벗겨진 사내 몸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선은 그림의 사선구도 첫 시작점에 못마탕한 표정으로 오른손에 두레박을 움껴쥐고

  물동이를 인 노부인에게로 간다.  우물가에서 염치없는 행동을 하는 사내가 꼴불견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눈초리와 입술모양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두레박을 건네고 있는 예뿐 아낙과 할멈은 '길쌈'에 나오는 두 여인과 닮았다.

 

 

[빨래터]

 7. 빨래터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빨래와 빨레터에 대한 시대적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옛날과는 달리 사정이 많이 달라져 빨래하는 일이 훨씬 수훨해졌지만 손빨래를 한다고 하면

  어렵기는 매   한가지로 느끼는 것 같다.

  일찍이 여성이 거의 전담한 가사 중 힘든 일을 순서로 세가지를 들라면 직조하기, 

  빨래하기, 물긷기를  꼽을 수 있겠다. 

  집안에서 조차 내외담을 쌓고 남여유별 , 여성은 열 살이 되면 집빆을 맘데로 나다니는

  것을 부도덕한 일로했던 조선시대에는 , 성인이 된 여성이 눈치 아니보고 당당히

  다닐 수 있던 곳 중에  노동의 공간인이기도 한  빨래터(냇가, 바닷가)와 

  물긷는 곳(우물, 샘터, 개울)이 있였다.

     이 시대에 남아 있던 여성의 합법적인 해방구(탈출구) 중에는 빨래터가 있었다. 

  우물이건, 샘터건 냇가에는 예나 지금이나 생명이라는 물과 바람이 있어 자연스레

  생명활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여름 금남구역이기도 한 빨래터는 사실 힘든 노동의 공간이었다.

  노동의 공간이었지만 여성전유의 공간이므로 이웃 여성과 자유롭게 만나고 소통하고

  노는 공간 이었기에 성적인 대화 포함한 , 은밀한 밀담이 가능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양반의 입장에서도 필요했던 합의에 의한  여성해방구였다

     각설하고 이제 그림을 감상하자.

   작품의 구도를 보면 우선 큰 사선 구도에 이차적으로 세부적인 X-자 구도로 되어 있다.

   화면을 대각선 방향으로 나누어 왼쪽 아래에는 빨래하는 장면, 오른쪽 위에는

   그 장면을 훔처보는 인물을  배치하였다. 

   이그림의 주인공 격인 양반은 바위 뒤에서 갓을 깊이 눌러 쓰고 부채로 얼굴을 가린채 몸을

   매우 잘  숨긴 것처럼 보이지만, 관객인 우리에게는 상반신이 다 다보인다 ,

   불쑥 나온 바위는 여자의 은밀한  부위를 바라보느라 한껏 부픈 양반의

   남성 심볼의 상태라고 암시한다. 바위의 가장자리를 흐르는 굵고 진한 선이

   한창 벌기한 선비 몸의 상태를 잘 말해준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면 빨래하는 두 여인이 보인다. 두 여인이 치겨 올린 빨래 방망이를 지금 막 내려

   치려 하는 모습인데 공교롭게도 두 방망이 끝이 모두  훔쳐보는 사내와 바위를 가리키고 있다, 

   즉 우리는 네놈이 훔쳐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표현이다.

   문제는 여성의 마음이다,  중간에 위치한 젊은 여인 양태를 보자.  왼손으로 방망이를 치켜 들고 모르는

   척 바로 옆에 있는 후덕한 연인에게 말을 걸고 있지만 ,

   이 여인은 치마 속 속바지를 왠 일인지 허벅지 위로   필요 이상 끌어 올려 ,

   엉덩이를 슬쩍 들어 올려 허벅지를 보여주며 바위 뒤 관음증 양반을 유혹 하고 있다.

       시선을 들어 , 대각선 중앙을 관통하는 사선을 그어 너럭 바위 위에 앉아

    머리를 다둠고 있는 여인을 보자

    머리를 다둠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빨래는 끝나있다. 빨래한 옷들은 오른쪽 바위 위에 널려있다.

    눈에 띄는 점은 아랫도리를 드러내놓고 칭얼거리는 아가가 젖달라고 엄마에게 매달리며 젖을 만지고

    있지만 반응은 심드렁  이미 젖 달라은 아이는 눈밖에 있다.

    왜냐하면  치마를 걷어부쳐 넓적다리 안을 훤히 보이게 앉아 본인의 머리를 빗는

    이 여인은 지금 거듭나는  중이다 ,  

    여인으로. 아내,엄마,며느리라는 역활을 끝내고 여인으로 말이다.

      끝으로 사선의 끝 맨 왼쪽 발을 물에 담구고 빨래를 짜는 여인의 표정을 읽어보자

    지극히 담담한 표정으로 야무지게 빨래감을 움껴지고 짜고 있는 이 여인의 표정은 주위 돌아가는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평온하기 까지 하다.

    생활에서 오는 모든 스트레스를 여기 빨래터에서 새탁하며 방망이를 힘껏 내리쳐치며 해소해서 일까?  

 

 

[세참]

8. 점심(새참)

 

   강희맹의 <금양잡록> 중 노동요가 실려 있는 "선농구" 14수의 하나인 '배를 두드리며' 작품을 보면

 

   " 광주리에 담긴 향기로운 보리밥이여 / 아욱국 달디달아 숟갈이 매끄럽게 흐르네

     어른 젊은이 차례로 둘러 앉아  / 왁자지껄 밥 먹는 소리 요란하다

     달게 포식하매 속이 든든 하니 / 배를 북처럼 두드리고 그저 흡족해할 뿐   "

 

     아침 일찍 나와서 허리 꼬부리고 점심 나절까지 일하다 보면 뱃속은 요란한 소리를 낸다.  가벼운 농구

   하나 들 힘조차 없다.  이 노동요는 힘든 노동 끝에 배불리 먹고 흡족해 하는 농민의 심정을 노래했지만

   현실은 그렇치만은 못했다고 말 할 수 있다.

     들밥, 점심, 혹은 새참으로 불리워지는 이 그림을 찬찬히 보느라면 비릿한 땀냄새가 풍겨 온다.

   구도를 보면 활력을 주는 X-자 구도다. 큰 대접으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오른쪽 위 웃통을 벗은 젊은이

   와 멀지기 앉아 사람들이 식사 끝내기를 바라는 검둥이를 연결하는 선과 일찌감치 식사를 끝내고 홀부채로

   땀을 식히는 장년인에서 시작하여 가슴을 열고 젖을 물리는 여인으로 연결되는 사선이 그 것이다.

     우선 먹고 있는 음식을 보면  젓가락이 짚는 반찬도 한 가지일 뿐이고  야채 국그릇도 안 보인다.  이제

   식사도 거의 끝나 가고 막걸리 먹기가 시작 되었다. 오른쪽 윗쪽에 술을 들고 대기하는 젊은이도 보인다.

     집에 있다가 막걸리를 들고온 젊은이까지 포함해서 장정이 일곱인데 반찬 그릇이 고작 두개다.

   보나마나 밥도 보리밥에  잘 해야 열무김치 몆 조각일 것이고 푸성귀에 된장을 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여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었일까?

   농사일이란  해가 있는 한 계속되는 것으로 땡볕에서 오전 내내 일하다가 짬을 내어  그늘에서 쉬면서

   막걸리를 곁들인 새참을 먹으면 세상 행복하다, 직접 일해본 사람이면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왜냐고, 모심기를 해보면 알 수 있다 단순 반복적인 일인데도 하는 일이 끝도없어 막막하다.  

   막걸리는 일의 한심함과 일에서 겪는 고통을 잃게 하는 일종의 환각제이기도 하지만 맘에 쉼표도 찍게한다.

    그러면 이 여유로음을 주는 주인공들의 면면을 살펴 찾아보자

   맨발에 웃통을 홀딱벗은 편한 옷차림으로 식탐을 즐기는 가족적 모임을 자유분방하게 묘사한데서 그리고 

   무심한듯  조용히 멀리 앉아 사람들의 식사 마치기를 기다리는  검둥이 모습에서 , 그리고 아침부터 일터에

   갖고 올 점심을 준비하느라 일꾼 못지않게 본인도 무척 배가 고풀탠데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린

   아가에게 젖을 물리는아낙의 태도에서도 우리는 차례를 기다리는 현살적인 삶의 여유로움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또, 단원의 풍속화에 항시 나타나는 무심한 사림이 이 그림에도 보인다.

   화면 왼쪽 끝에 고개를 약간 숙이고 다른 등장 인물들과는 달리 점잖게 앉아서 조용히 젓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있다.  웃옷도 반만 벗고어 걸치고  단정히 식사한다.

   이 인물의 미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과 바른 앉은 모습에서도 여유로움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

 

[행상]

 9. 행상

   

    말작(末作)이란 말이 있다 , 조선시대에 수공업과 상업을 두고 하는 말이다.

 특히 상업을 제일 천한 직업(놀고 먹는 직업)으로 규정하여,

  궁중과 양반네들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시설인 육지전

 과 지정된 시전 상인 외에는 상행위를 억제했고 , 천인으로 천대받는 행상에게도

 노인(여행 허가증)을  발급 받게 하고 , 더하여 '공상세'라는 세금까지

  공적으로 내게 하였다고 한다.

   '부부행상' 이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의  전면에 서있는 등돌인 여인을 보면

 머리에 구덕(대바구니)을  이고, 처네(애기를 업는 싸게)도 없이 진

 애기 머리숫이 적다 그리고 치마를 걷어 올려 허리에 바싹 매고

 지팽이를 들고  길을 떠나려고 하는 행색이 참으로 어려운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이 여인은 <행려풍속도병>의 8폭 중 하나인 '포구의 여자 행상들' 에 등장하는

 사람들 맨 오른쪽의  아이를 업은 여인과 똑 같다.

   왼쪽 나무로 엮은 젓통이 얹혀 있는 지게를 진 남자는 남편인 것 같다.

 비록 낡아서 너덜거리는 벙거지를 쓰고 있지만 부인을 바라보는 표정은 부드럽고 정답게 보인다.

 웃고 있지만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안타까울가, 남편의 입장에서는 무사히 일마치고

저녁에 다시 상봉을 빌고 있지 않을까,  떠돌이 행상의 삶이란 뻔 하지 않은가. 부인은 박물장사다.

 이 그림이 무거운 것은 이고 진 모습과 행식으로 봐서 이 둘의 삶이 매우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걷어 올려 허리에 질끈 동여 매었다는 것은 .

 걸음을 쉽게 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인의 남편을 보는 눈빛과 복장에서 삶의 무게를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그래서 조금 편안해 진다. 

 

[나룻배]

10. 나룻배

    

   그림을 보면 두 척의 나룻배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배의 크기도 비슷하고 배에 탄 사람들의 숫자도 엇비슷하다. 

 윗배에는 10명의 승객과 사공 두 명, 그리고 소가 나뭇짐을 잔뜩 싣고 있다고, 

 아랫배에는 더 많은 사람과 동물들이 있다.

 12명의 승객과 소 한마리, 말 두마리에 사공이 한 명이다. 윗배는 사공이 두 명이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앞서 나가고 있다.

   이물쪽이 상석인지 탑승 인원 중에서 도포에 갓을 쓰고 사방건을 쓴

 양반들이 두 배 모두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룻베 탑승 인원의 과반수 이상이 머리에 뭔가를 쓰고 있는데 보면,

 갓을 쓴 양반, 초립을 쓴 사람들 , 삿갓을 쓴사람들에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인들까지 다양한 모지를 스고 있다.

   강을 가르지르는 두 척의 나룻배나 탑승한 사람들 그 어느쪽도 이 그림의 주인공이 아니라

 여백 기득히 차 있는 물이  주인공인 것처럼 ,

 배도 무심한 듯 떠 가고, 탑승한 사람들도 모두 표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윗배 이물에 앉아 담소를 주고 받는 두 양반과 뒷쪽에 앉아 있는 가족과

 열심히 노를 젖는 두 뱃사공의 움직임도 무심한  듯 강을 내려다 보고있는

 사람들에 시선 속에 묻혀 버렸다.

    물론 한강에 다리가 없던 시절, 드넓은 강을 어쪄다 건너게 되면 색다른 체험이되고

 무섭기도 하고 신선한 강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건너야할 저 멀리 있는 강안을 바라보는

 일이 생경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교통수단으로 먼거리는 육로 보다는 수로를 주로 이용하던 시절

 나룻터는 배가 오가며 날라온 화물이 쌓여서 술집도 많았겠지만 이별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즉 나루를 건너는 것은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이요, 다시는 기약할 수 없는 이별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유목민이 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정착이라는 것이 없고 그저 물처럼 사계절을 이동했다고 한다.

  혹자는 동해의 푸른 바다와 파도를 보고 이 반도에 정착한 것은

  바다를 초원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강변하는 데 꽉 막힌 일상에서 탈출하여

  물과의 만남으로 몸을 물에 맡길 때 세속은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림에서의 여백은 마음의 여유라고 할 수 있겠다.

 물과의 만남으로 그림은 비울 것 채울 것으로 절묘하게 비벼졌다.

 

 

[노상과인]

11. 노상과인(흠쳐보기)

      

   이 그림을 보면 양반들의 격식은 갖추었으나 겉과 속이다른 생활태도,

 즉 겉으로는 양반이네 하는 모습을   보이나 그 이면, 안보이는데서는

 속(俗)스러운 생활상이 많다고 넌지시  비꼬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선, 동 시대의 타고다니는 운반수단(자가용)을 살펴보면 말,나귀,소 등이 생각이 날 것이다.

 '부담마'라는 수단은 양반가의 여성이 장옷을 걸치고 밖에 외출할 때 타는 말로 무담이라는 개인 장신구나

 옷감 등을 넣는 대나무로 만든상자로, 부담롱을 말에 매고 그위에 여자들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말을 타고 견마를 잡혀야 하지만 그림에서 처럼 , 말이 없으면 ,

 대신에 소에 길마를 얹고  무엇인가 채운 가마니를 얹어서 사람이타고 다니도록 했다고 한다. 

   한편, 조선의 선비들은 말보다는 나귀를 타고 외출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나귀는 말보다는 체구가 작았지만 강인한 짐승으로 말보다 느리지만 비용이 적게들고 병치레도 없어

 풍류와 여유를 즐기는 문반들에게는 실속있는  운송수단이었다.

   문제는 이 양반의 외출행색이요, 주제에 영웅본색인지 부채

 너머로 여인네를 쳐다보는 눈빛으로 봐 체통을 이미 버린지가 오래요,

  반면 쓰개치마로 선비의 음흉한 눈인사를 받고 의연하게 화답하듯 눈길을 피하려 하지않는

 여인의 여유가 그러하다.

   소를 탄 아낙 건녀편에는 맨발의 어린 종이 이끄는 말을 타고 한 젊은 선비가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말갈기 위로 삐죽 생황이 나와있으니 풍류를 찾는 양반인 것은 분명한데,

 재미있는 것은 당나귀 뒷다리 사이에  있는 망아지이다.

 그리고 보면 양반이 타고 있는 나귀는 새끼를 낳은지 얼마되지 않은 부양가족이 있는 어미 나귀

 그래서 주인인 선비의 구차한 나들이에 새끼도 어미젖을 물고 따라 나섰다는 이야기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도덕이라는 사회규제와  성적 욕망의 아우성 사이에서 시달리기 마련인가, 

 도덕이란 외외부의  압력을 인식하고 자신의 욕망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차단하려 하지만

 마음은 어느세 이성을 탐하고 있으니.

 길거리 곁눈질이 사랑이 되는 경우가 있어 , 길거리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교환하는 시선을 성욕의 시선으로 간주되던 사회가 있었다.

  오즉했으면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 했겠는가.

 

[장가가기]

12. 신행(장가가기)

    

   이 신행 그림은 풀어쓰면 '장가가는 행열 '정도로 적어볼 수있겠다.

장가간다는 말이 아직도 있다. 저의 경우도 40년전의 일이었지만 장가를 갔다. 

다시말하면 처가집에서 , 하루밤 자고나서 다음날 신혼여행을 갔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고향을 떠너온지도 오래돼서 아직도 그런 절차를 준수하는지 모르겠지만 ,

 기록을 보면 조선 중기 때 까지도 처가살이를 한달 정도는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림을 보면 청서등룡을 앞세운 행렬이 보이지만 좀 이상하다, 뭔가는 엉성하다.

행렬 맨 앞을 인도하는  청서등룡을 든 잡이 둘이 모두 전복을 입고 대로 만든 초립을 쓰지도 않고 ,

한명은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다른 등룡잡이는 더해서 맨발이다.

 그라고 신랑을 보면 뒤에 일산을 들고 따르는 하인도 없고 격식 상 사모관대하고

차면으로 입을 가리지도 않고있다. 

등룡도 겉에 위는 붉고 아래는 푸른색의 등룡의를 씌우는데 엉성하다.

   백마를 탄 신랑은 어린나이임에도 의젓하게 보인다.

복장은 사모관대에 손에는 홀도 들고있다.

행색으로 보거나 나이로봐 과거에는 급제하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 데 ,

정2품이나 3품등의 벼술아치가

밤에 사용하는 청서등룡을 사용하는 것은 일생에 단 한번 있는 경사라 허락되는 것이다. 

 

 

[고기잡이]

13. 고기잡이

     

   그림을 보면 바다에 말장을 빽빽이 박아 길게 담은 어전(어살)과 3척의 배 ,

갈매기 한무리 , 12명이 사람들이 X-자 구도로 그려져 있다.

썰물이 지나간 조용한 한 때지만 오른쪽 윗쪽에서 작업이 끝나면 고기를 잡을 생각으로

어살 위에 내려 앉아 기다리는 갈매기들,  놓칠세라 때살이로 흐드러지게 날라오는

 갈매기 무리와  어살 안에서 광주린지 채반같은  것으로 물고기를 담아 건네고

 고물에서 받아 들고 있는 사람, 그리고 같은 배 선두에서 긴 장대로 매를 고정하는 사람,  

 그 아랫쪽 왼손에 큼지막한 물고기 두마리를 들고 있는 사내가 그림에 잔잔한

긴장감과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육지에서 쓸만한 땅도 소유하지못하는 사람들이 육식을 통해 흰자질을

섭취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거의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땅 주인들 몰래 올무를 놓아 야생의 새나 짐승을 잡는 일 외에 그런데로 쉽게 고기를

섭취할 수있는 방법은 방법은 하천이나 근해에서 물고기를 잡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또 그것은 매우 재미도 있는 일이었다.

근해에서 고기잡기는 일의 어려움과 위험이 따르니 ,

아마 어살을 놓는 것은 하천에서 부터라고 해야겠다.

  어전에는 어살과 독살이 있는데 서해안은 갯뻘이 길고 넓어  나무를 박아 만든 어살이 많고,

남해안의 경우는 주로 주변에서 날라온 돌을 쌓아 만든 돌살이 많다.

 

 

[기와이기]

 14. 기와이기

 

      이 그림은 조선시대의 건축 노동현장을 그린 유일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사실 일상에서 흔히 목도되는 일은 별로 주목되지 않는 일이라 우리의 의식에 잘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그리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와 전란이 있었던 선조.중종 때와 달리 영.정조의 시대에는 일상경제가

   조금은 녹녹했던 모양이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조선말기 때의 도성사진을 보면 한양 동성 밖은  초가집 일색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그림은 사실 인간 중심 삶의 현실과 노동의 고달품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배경사물이 생략된 상태라 계절은 알 수 없으나 농번기와 추수기가 지난 가을 정도로 본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이중의 x-x 구도로 사람과 사물이 서로 겹친다.

  사방건을 쓰고 검정 가죽신을 신은 장척(10척이 넘는 긴 자)을 손이 쥔 노인(대목=총감독)과

  지붕의 기와 밑에 깔 홍두깨흙을 뭉쳐서 매달고 지붕 위로 막 올리려고 하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말대답하는 사내로 연결되는 선과 , 지붕 위에서 오른손을 뻗어 아래서 던진 기와를 막 잡으

  려는 사내와  오른쪽 밑, 대패 양 옆에 있는 손잡이르 잡고 대패를 밀고 있는 목수와 연결되는

  선이 주 x 구도이다. 사물은 공중에 떠 있는 기와와 연결되는 망개톱에 이르는 선과 장척과

  그림의 완쪽 밑  땅 바닥에 널려있는 기와와 연결 사선이 겹치는 x자 구도다.

 

(&nbsp;조선&nbsp;1801년, 133.7 x418.4cm, 호암미술관 소장 )

 

  *   삼공불환도

 삼공불환" 이란 자연과 더불어 사는 평안한 삶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 자리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그림은 1801년 12월 순조가 천연두를 앓고 난 후 쾌유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세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한다.

 산과 들판과 바다가 펼쳐진 자연 속에서 삼정승이 조금도 남부럽지 않은 전원의 생활을 누리고

 있는 장면이다. 기와집을 에워싼 산세가 속세를 떠난 선비의 기상을 표출하듯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다

 집안에서는 다양한 사대부가의 생활상이 자못 서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묘사되고 있다.

 담 너머 집 밖에는 넓은 논밭에서는 농부의 손길이 바쁘고, 왼쪽에 비스듬이 솟아 있는 나지막한

 동산 밑에는 네 채의 초가집이 보인다. 그 위에는 돛대만 삐죽하게 보이는 바닷가 풍경이 여스름한

 안개 속에 잠기 듯 표현되어 있다.

   단원 작품세계를 모면  30대~40대에 서민풍속을 주로 다루웠다면 40대 이후에는 서민풍속에서

 사의적인 문인화풍으로 달라졌다.  문인 의식이 팽배해진 50대 이후에는  생략과 변형에 의한 

 감각적인 구성과 넓은 여백과 서정이 넘치는 모티브와 율동감을 살린  선묘 등으로 단원은 그의 특유한 

 회화세계를 구축하게 되고 , 표현방식에도 남종화풍을 선호하게 된다.

 

 

**

참고

 1. 조선풍속사 1권  강명관   2010 도서출판 푸른역사

 2. 풍속화 붓과 색갈로 조선을 깨우다. 서주희 2008 (주)시공사

 3. 단원 김홍도  오주석 2008 열화당

 4. 조선의 아트저널리스트 김홍도  심만수 2016 (주)살림출판사

 5. 한국의 풍속화 정병모 20000  한길아트

 

2019. 1. 8.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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