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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 , 혜원전신첩
. 근역서화징이란 오세창이 1917년 편찬하고, 1928년 계명부락부에서
간행한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이 있다
324면의 국판으로 ‘국역’이란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수록된 서화가를 종합하면 신라시대부터 조선 철종까지 화가가
392명, 서가는 576명, 서화가는 149명으로 모두 1,117명라고 한다.
서예가인 오세창(1864-1953)의 부친인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당시 천죽재란 큰 서화의 수장고를 보유했던 예술품 수집가였다.
조선말기에 역관이었으며 기자 그리고 대한민보의 사장을 지냈던 위창은
예술적 분위기의 가문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서화에 대한 정보와 감식안을
두루 갖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편찬한 ‘근역서화징’ 에서 혜원에
대한 소개로는 ‘화사약보’를 인용하여 겨우 두 줄만 소개하였다 한다.
“신윤복申潤福, 자 입보, 호 혜원, 고령인, 첨사 신한평申韓枰의 아들,
화원畵員, 벼술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 “
. 조선말기 이창현(1850-1921)이 지은 성씨 계보책으로 , 양반층을 주로
기록한 다른 성씨 계보책과는 달리 , 역관 등 당시 중인계층의 계보를
수록한 점이 특징인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성원록이란 책이 있다.
신윤복의 가계를 보면 신윤복은 신말주(1439-1503)의 11대손이다
신말주는 계유정란의 공신 신숙주의 동생이다.
세조가 단종을 쫒아내고 즉위를 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전라도 순장에서
은거하다 나중에 대사간, 전주부윤, 수군절도사까지 지낸 분인 사대부집안
이다. 다시 말하면 고급관료의 집안으로 어찌하여 양반이 아닌 중인계보인
성원록에 기록 되었을까.
성원록의 고령 신씨조의 혜원의 가계를 보면, 신말주의 4대손인 경뢰는
대원과 백원이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형 경지가 아들이 없어 대원을 양자로
보낸다. 양자로 간 대원 대代에서 흥미로운 일은 광해군1년인 1619년에
자신을 포함해서 두 아들이 모두 역과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를 보면 한번에 양반의 시험 중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나뉘어서 소과에서 생원과 진사를 각각 100명씩 뽑고 대과에서는 3차로 걸러
33명, 무과는 28명을 선발했다.
그런데 역과(통역)는 율과, 의과, 음양과 함께 잡과로 중인이 보는 시험이다.
그렇다면 경뢰의 부친인 수진代는 두 형제였는데 성원록에 수진 이하의
계보만 실려있는 것을 보면 수진은 서자庶子 출신인 것으로 보여진다.
혜원은 조선후기 풍속 화가 중 한 분이다 , 그러면 풍속화란 무엇인가.
정의해본다면 인간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 중 좁은 의미에서 궁궐이 아닌
민간의 생활상을 다룬 그림으로 한정하며, 좁은 의미의 풍속화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린 士人풍속화와 일반 백성의 다양한 생활상을 다룬 庶民풍속화로
또 나뉘어진다.
그런데 그 소재가 인간의 일상적, 구체적인 생활모습이 화폭 전면에 등장하는
풍속화의 경우에는 조선 계급사회 양반관료들의 모습이 소재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양반가의 여성이 등장하는 일은 더 더욱 없었다.
풍속화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이 화가가 실존하던 당시, 함께 동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그림의 중심에 있어 그들의 삶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것에
있다면 혜원의 그림에서 우리는 사랑과 욕망의 주체로 등장하는 여성 성을
주재로 일어나는 선정성이 곁들어진 날카로운 해학과 풍자에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생활상을 표현하는 행위로서 풍속화는 선사시대에는 암각화나
청동기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간단히
조선 후기(18~19세기)에 한정하여 살펴보자.
조선 고유문화의 절정기는 숙종(재위 1675-1720)에서부터 정조(재위
1777-1800) 때까지 125년간으로 보고 있다.
이시기에 중요한 변화는 풍속화의 수요가 궁중과 민간에 공히 성행했다는 것
그리고 더하여 풍속화가 속화俗畵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속화는 원래 문인화와 대조되는 가치개념으로 저속하다는 성聖적 가차관에서
보다는 그것을 그린 화가의 사회적 신분으로 작품을 평가 분류되었던 것이었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속화가 문인화의 상대개념이 아니라 풍속화 또는 민화를
의미하는 분류개념늬 용어로 그 의미가 바뀐 것이다.
즉 이전까지는 고아하고 아취있는 세계를 숭상하고 통속의 세계를 푸대접한
것이 대세였던 것이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났다
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서민 풍속화가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조선사람의 관념에 통속의 세계까지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될 정도로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는 17세기 이후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명말의 남종화론에서 탈피하여
실재하는 대상과 경험의 중요성을 주장한 예술론인 당시의 '천기론'이 예술계에
대세인 것과 무관하지 않고, 진경산수화에서 보듯 현실과 경험을 중시한
이 시대(18~19세기)의 보편적인 가치관이 문예관 및 예술방법론에 반영되
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중국의 문인화 및 명말의 남종화론의 모방에서 벗어나 조선후기 진경산수화
및 조선 남종화, 풍속화를 창안하여 우리만의 고유한 회화의 기틀을 다지고
이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역사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로 사인삼재 士人三齎인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을 꼽는다.
이들은 모두 조선후기 진경문화를 이끈 백악사단인 율곡학파의 동문들로
특히 조영석(1686-1761)은 겸재와 더불어 진경시대에 인물 풍속화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사대부다. 관아재의 ‘그림을 그리되 대상을 직접 보고
그 참모습을 그려야만 한다는 창작관에 비롯된 그의 사생적 풍속화’에 대해
문인 이규상(1727-1799)은 ‘ 우리나라의 그림이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의 풍속화는 주로 화원들이 중심으로 활발하게 그려졌다.
특히 인간이 그림의 주체가 되어 일상의 구체적인 모습이 그려진 인물중심
풍속화는 사대부인 조영석을 중심으로 화원인 단원 김홍도 (1745-1806), 혜원
신윤복(1758-1814?) , 긍재 김득신(1754-1822)이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관아재의 경우는 평범한 우리네 삶의 정경을 소재로 진솔하게 묘사했다.
담백하고 고아한 필선과 맑고 화사한 담채는 그의 특유한 감각과 세련된 문인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김홍도는 조선의 서민층의 소탈한 생활모습을 아주 다양하게 많이 그렸다.
서민층의 풍속을 해학과 풍자를 곁들여 그려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소질이 있다. 그의 필법은 주제로 등장하는 모습에 집중할수 있도록
최소화된 색채 이용과 주재을 앞세우고 배경을 삭제하는 여백의 미를 이용했다.
반면에 혜원의 경우는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사용하여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인물들의 몸 동작과 표정을 비롯하여 각종 배경을 뛰어난 소묘력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몸짓과 표정은 그 속내를 훤히 드려다 볼 수
있도록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했다.
선이 가늘고 유연함으로, 주제를 암시하기 위해 치밀하게 주변배경을 부각시켰고
한복의 아름다운 색감을 살리기 위해 부드러운 담채 바탕에 뚜렸한 원색을 사용하여
당시 그들의 복식문화와 함께 풍류생활의 멋과 운치를 실감나게 전해준다.
혜원이 이러한 풍속화를 그릴 수 있는 배경으로는 조선후기 초기 상업화 과정에서
경제력을 축적하여 양반 못지않는 부를 축적한 서민 지주들이 후원지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통 사대부와는 다른 취향을 가진 풍속화의 든든한 수요자였다.
혜원은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시대 성리학 이념에의거 남성위주 계급사회에서
억압되고 차페된 존재감없는 인간 본성인 , 여성 성을 등장시킨다.
상위층인 양반들의 인간 본성에 본질적으로 반하는 위선과 불륜 행위를 화폭에 담아
파헤치고 풍자하고져 천민계급인기방의 기녀들 과 계집종 , 과부 등을 기가막히지만
천박하거나 상스럽지 않게 교묘히 작품에 등장시켜 성을 풍속화의 회화성으로 끌어 올
렸다. 그렇게 남녀간 성풍속을 과감하게 화폭에 보여줌으로 , 조선시대 사회풍속의
숨겨진 이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편 그러한 풍속을 도회적인 세련된 감각과 세련된
필치로 형상화하여 조선시대의 풍속화의 영역을 보다 다채롭게 넓혀 주었다.
문제는 정조 사후 자유분망한 사회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그의 작품 활동도 쇠퇴기에
접어들고 혜원 자신도 제도권(도화서)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그가 남긴 작품은 대략 1813년의 작품까지 전해지는 데 이때쯤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의 '혜원 전신첩' 은 1첩 30면 으로 , 크기는 28.2 X 35.2cm 이다 ,
재질은 종이 바탕에 담채로 그려져있다.
이 화첩도 일본에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오사카에 있는
고미술상에서 구입하여 새로 표구하였는 데, 이때 오세창이 표제와 발문을 썼다고 한다.
1970년 12월 30일 국보 제135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혜원전신첩은 대부분 기생과 한량을 중심으로 남녀간의 춘정이나 정념 또는 양반사회의
풍류를 소재로 그린 것이다.
화첩에는 청금상련, 기방무사, 청루소일, 월하정인, 월야밀회, 춘색만원, 소년전홍,
주유청강, 연소탑청, 상춘야흥, 노상탁발, 납량만흥, 임하투호, 무녀신무,
주막, 쌍검대무, 휴기답풍, 쌍륙삼매, 문종심사, 노중상봉, 계변가화, 정변야화,
삼추가영, 표모봉심, 야금모행, 유곽쟁웅, 이승영기, 단오풍정, 홍루대주,
이부탐춘 30점이 실려있다.
등장 인물들은 남녀가 모두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눈초리가 치켜올라간 선정적인 모습에
맵시와 멋이 넘치는 자태로 그려져있다. 도시적인 세련미와 함께 낭만적, 색정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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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정과 유혹 ]
화제를 보면 春色滿園中/ 開花爛漫紅 라했다.
그런데 남녀 주변을 보라 무슨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단 말인가
그런데 두사람의 얼굴을 보면 남자는 낮술을 마셨고
여인은 뭔일이 있었는지 얼굴이 붉게 타올라 있다.
남자는 무관의 평상복인 철릭을 입고 있고 부채를 쥐고있는데
갓을 쓰고 있고 합죽선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양반임을 알 수 있다.
여자는 봄날 홀로 앞치마를 두르고 나물을 캐러온 어염집 여인이다.
이양반은 왠일인지 봄나물이 가득한 바구니에 손을 넣고 있고,
그러매도 얼굴에 색기가 흐르는 여인은 싫어하는 기색이 전혀없다.
바구니 밖으로 나물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초가지붕을
보면 거시기처럼 생긴 것이 불쑥 솟아 있어 바구니와 대조를 이룬다.
밤에 아낙네 둘이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 여자는 두레박으로 물을 푸고 있고, 한 여자는 머리 위에 똬리를 올려 놓은 것을 봐서는
이제 물동이를 이고 떠날 참인 것 같다. 일각문 위로 달이 뜬 것을 보면 밤중이다.
밤에 물을 길고 나른 것을 봐선 두 여자는 양반집 부녀자가 아니다.
그런데 왠 양반 한분이 담너머에서 뒷짐을 지고는 이 여인네들을 음침하게 흠쳐보고 있다.
붉는 봄꽃이 가자마다 잔득 피어있고 만월이 떠 있어 춘정이 가득 넘치는 봄밤이다.
그런데 서있는 여인을 자세히 보면 앉아 있는 여인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선듯 자리를 못 뜨고
물동이는 멀리 둔채 손에 턱을 얹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민하는 모양인 것 같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봐서는 이 흰 민짜저고리 복색의 여인은 이집 양반네 여종인 듯 하다.
혹시 이 젊은 여인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밀고 숨어서 기다리는 상황이 아닌지.
화제를 보면 密葉濃堆綠 / 繁枝碎剪紅 이라 적혀 있다.
'만춘이 되어 녹음이 짙어 지니 번성한 가지에서 붉은 꽃이 떨어지네'
전면을 장식한 꽃 나무는 배롱나무로 흔히 나무백일홍이라는 불리우는
꽃나무다. 그런데 붉은 꽃들이 부셔지고 잘리운다니 무슨 말일까.
화제로 '소년이 붉은 꽃을 자른다'로 이때 꽃은 당연히 젊은 여자다.
그림을 보면, 상투를 틀고 사방관을 쓴 젊은 남자가 완력으로 여자의 손목을
쥐고는 당기고 있고, 짚신을 신고 있으며 고름만 자주색인 저고리를 입고 있는
여인은 뿌리치지 못하고 엉덩이를 잔뜩 뒤로 빼고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괴석이 있고 꽃나무가 있으며 흙담이 둘러져있는 것을 보면
어느 양반집 후원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림 속의 괴석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크다. 더해서 괴석은 분이
아니라 땅에 뿌리르 박고 위로 치솟아 있다. 최대로 발기한 거시기를 닮았다.
거기다 괴석의 윗부분 몸체에 무언가 흰 액체가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나게
그려져 있다. 이젊은 여인의 행색을 보면 분명히 이 양반댁의 계집종이 분명하다.
정리보면, 봄날 행세깨나 하는 양반가의 젊은 서방님이 후원을 거닐다 춘의에
만취한 상태에서 저고리로 가슴을 다 가리지 못한 채 맨살이 드러나 있는 여종을
보자 부기를 못이겨 범하려고 하는 장면인 것 같다.
그래도 정변야화는 채면치례를 하건만 , 여기 갓 장가든 젊은 양반은 젊은 종년의
의사에 반하며 반상을 이용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으려 한다.
* 이상의 세 그림에 등장하는 남자는 예외없이 양반이다.
대낮에 술을 마시고 나물 캐고 돌아오는 아낙의 바구니에 손을 집어넣거나, 달밝은
밤에 넌지시 보낸 유혹의 손길에 여종이 넘어오기를 음침한 눈길로 바라보거나,
후원에서 만난 여종을 춘정을 못참아 손목을 덥석잡아 당기는 손길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양반이다.
성의 문제에 있어 조선은 철저하게 불평등했다. 남성은 타인의 부인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아내 외의 여자와 관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즉 정식부인 이외의 여성에게서 얻은 자식을 서얼이라했다.
서자는 양민 이상의 여성과 관계에서 낳은 자식이고, 얼자는 계집종,기생,무당 등
천민 여성과 관계해서 낳은 자식이다.
고려 때와 달리 조선은 성리학이념으로 위계질서를 정립하며 일부다처제에서
일부일처제로 고치가며 , 사대부는 처와 첩의 구분을 경국대전에 명문화시켰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서얼들이 받았던 차별이 구체적으로 적혀있는데, 서얼출신은
계급사회에서 문과의 초시인 생원시, 진사시에도 응시할 수가 없었다.
[ 밀회 ]
이 그림은 화제에서 시간이 삼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認知 '*
(월식이라) 달빛도 어두운데, 두사람의 마음 두사람만 알뿐.
하룻밤을 오경으로 나누어 가장 야심한 밤인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를 삼경이라 했다
조선시대에 한양 서울 도성내는 통금이 있었다.
매일밤 10시에 28수에게 종을 28번 쳐서, 밤새 안년을 기원하며, 인정이라 성문을 닫고
통행을 금지하고, 다음날 새벽 4시에 파루라하여 33위 제석천에 타종을 33번치고 통행
금지를 해제했다.
통행금지를 어기면 직결처분에 넘겨져 맨살에 곤장을 맞았는데, 3경범은 30대를 맞았다.
이제 그림을 보자.
조선시대 양반가의 여성은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다. 꼭 외출을 하려면 종과 함께 나서는
것이 통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여성의 차림을 보면 기생 같지도 않고 또 가난하게도
보이지 않는다. 남자를 보면 그의 왼손을 옷 속에 집어넣고 무언가를 더둠어 찾고 있는
것 같지 않는가, 헤어지기전에 무언가를 건네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달의 모양을 보자 희한한 것이 이달은 초생달도 그믐달도 아니다 초승달은 왼쪽이 등글고,
그믐달은 반대쪽이 등글다, 그리고 초승달은 동쪽 지평선에 그믐달은 서편 지평선에 잠깐
떳다가 보이지 않는다. 즉 반달은 낮에 중천에 뜨고 , 보름달은 초저녁에 동편에서 뜬다.
결과적으로 보름에 가까운 달인데 삼경이라 했으니 서쪽편으로 넘어가고 있는 달이다.
지금 처럼 공원 이나 여관 혹은 러브호텔같은 연애할 공간이 있을 턱이 없고 하물며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 이 남녀의 만남은 당시의 사회규범 상 합법적인 관계가 아니고
물론 부부관계도 아닌 것이 분명하니 남몰래 만나고 아쉬운 별리를 하는 상황같다.
* 이 화제는 혜원의 글이 아니고 이황의 문하생이 었고 임진왜란 때 팔도도원수로
참전했으며 후에 좌의정을 지냈던 김명원(1534-1602)의 시에서 발취한 것이라 한다.
정승은 젊은 시절 자기가 좋아했던 기생이 어느 양반집 후처로 들어가자 춘정을 못 이겨
담장을 넘어가 그 여인을 만나다가 붙잡혀 큰 치도곤을 면하지 못하게 된 때에 그의 형이
찾아가 아우가 제주와 학문이 뛰어나 뒷날 큰 인제로 쓰일 인물임을 알리며 선처를
잘 호소에 그 양반의 용서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原詩를 적어 보면 窓外三更細雨時/兩人心事兩人知/歡情未洽天將曉/更把羅衫問後期
위 그림도 한밤중 남녀의 만남을 보여 준다.
그림 오른쪽에 장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 있고, 왼쪽에는 어떤 사내가 여인과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담장 뒤에서 엿보고 있는 또 다른 여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
우선 두 여자의 복색을 비교해 보면 엿보는 여자의 저고리의 깃과 고름이 모두 자주색이고,
위에는 녹색 장옷까지 걸치고 있다. 저고리의 끝동, 깃, 곁마기, 고름을 다른 색의 천으로 꾸미는
것은 회장이러고 하는 데 이 여인은 자주색계 삼회장 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껴안긴 여인의 복색을 보면 깃은 그냥 저고리 색 그대로이고 소매 끝은 남색, 고름은 자주색이다.
그런데 남빛 끝동을 다는 것은 남편이 있다는 표시이고, 자주 고름은 자식이 있다는 표시라고 한다.
그리고 사내는 전립을 쓰고 있고 안에 동달이를 입고 곁에 소매없는 전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군복차림이므로 포도청의 장교인 포교다,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철편이다.
그리고 왼쪽 위편에 달이 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밤 중이다. 길 양쪽의 담장은 모두 기와를 얹었고
앞쪽 오른편 담장 안은 정원이 있는 기와집이다, 고급주택가란 말이다.
이시간에 시종도 없이 양반집 부녀자가 길거리를 다닌다는 것은 순라도는 포교와의 안면 있다해도
어려운 일, 강명관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이 남자는 주택가를 순라도는 포교이고 복색을 잘 갖춰 입은
기녀와 함께 골목길을 가다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민가의 부녀자인 왼편 여자를 만나자 당혹하여
여인에게 다가가 이처럼 가깝게 얼굴을 마주하며 구차스런 변명을 늘어놓는 장면이라는 것.
* 휴가철 가로등이 없는 시골길을 차를 운전해 본분들은 느끼시겠지만 전기시설 없는
거리는 참으로 어둡다. 조선시대 한양의 밤은 완전한 어둠이고 인적인 끊긴 거리는 다니기가
무섭도록 적막 속에 묻혔을 것. 쟁그랑 쟁그랑 포교의 철편고리 흔드는 소리만이 적막 속에서
들렸을 것이다.
초저녁도 어두웠겠지만 2경을 알리는 인경소리(밤10시)에 모든 것은 어둠과 정적에 휩싸인다.
이 완전 어둠 속에서 남녀의 만남은 이루워진다. 억압적인 제도 하에서도 꿈틀거리는 인간의
본원적 욕망을 '밀회' 와 ' 삼각관계'는 어둠을 빌어 보여 주고 있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여성의 젖가슴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수유를 위한 젖가슴 ,조선말기 선교사의
사진기에 찍힌 길거리에서 여인네 젖가슴 작품 외는, 충격적인 일이다.
이슬람 문화권의 차도르가 여성의 육체를 차페하듯 조선시대에는 양반가 여성이 입었던 장옷과 쓰개치마는
여성의 몸을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차폐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했다.
조선시대에 한문학에서 여성의 신체를 묘사하는 것은 금기였다.한시나 전통산문에서 언급되는 것은 열녀였다.
여성의 신체, 그것도 성을 연상시키는 신체는 언어로 재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문학의 사정이 이럴진대, 시각예술의 경우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계변가화는 마을 뒷산 '개울가변에 핀 아름다운 꽃'이란 이야기인데 '빨래터의 사내'라는 화제가 붙었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름에 소도시 주변 주택가 위.아래쪽 냇가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고 몸 씻는 것
보는 것이 흔했다. 그만큼 우리 여인네들이 청결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꽃은 여인네들이겠다.
그림 왼편에 체구도 늠름한 젊은 사내가 활과 화살을 든 채 고개를 돌려 오른쪽 끝에 앉은 여인을 보고있다.
이그림의 한량은 산속에서 사냥 중인 모양이다. 왼팔의 팔찌는 활을 쏠 때 옷소매가 활시위에 걸리지 않게
여미도록 만든 것이다. 젊은이의 복색을 보아 벼슬이 없는 백면서생이다. 아마 산속에서 짐승을 쫒다가 우연히
개울가에서 여인네를 만났다. 맨 위쪽 적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옷을 털어 펼치다 사내를 보고 얼른 안 간다고
눈쌀을 찌프리고 있는 데 나이가 있다. 그리고 빨래 방망이질을 열심히하고 있는 중년 여인이 있다.
주제는 한량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다. 가장 왼편의 여성 , 즉 머리를 감고, 목욕은 했는지, 조용히 앉아
가채의 일부를 남겨 놓은 재 긴 머리를 땋고있다. 그런데 이 젊은 처녀의 젖가슴이 저고리 아래로 드러나있다.
처녀도 젊은 사내의 시선을 인지했는지 양볼이 달아올랐다.
혜원의 그림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그림이 위 단오풍정이다.
음력으로 5월5일은 음양사상으로 보면 양의 수가 겹친 길한 날로 1년 중에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다. 그리고 모내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으로 본격적으로 여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창포를
삶은 물이나 상추에 맺힌 이슬을 받아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여 피부를 맑게하고 부스럼이 나는
것을 예방하였다.
이 그림에는 여덟 명의 여인과 두 명의 까까머리 중이 등장한다.
네명의 여인이 지금 한창 목욕 중이고, 한 여인은 그네를 타고 있다. 오른 쪽 위의 두여인은 목욕을
끝내고 가체로 땋는 큰 머리를 매만지고 몸매를 가다금고 있다.
오른편 아랫쪽에는 이 여인네들이 마실 술상을 보자기에 싸서 이고오는 계집종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관객의 시선은 바위 뒤에 숨어서 엿보는 동자들의 시선과 일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맨 왼쪽의 여자는 치마를 걷어 허리 중간에 대충 걸쳤을 뿐이라 젖가슴과 배, 엉덩이 아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돌섬 위에 앉아서 허리를 굽혀 상반신을 열심히 씻고 있는 여인의 오른쪽
젖가슴, 중심을 잡느라 올린 왼팔 밑 들려 올려진 저고리 밑으로 들어난 계집종의 탐스러운 젖가슴과
나무 그늘 밑에 앉아 땀에 젖은 가슴을 말리고 식히노라 젖혀 논 저고리 앞섶 땜시 노출된 여인의
젖가슴이 그것으로, 모두 다섯 여인의 젖가슴의 젖꼭지가 짙은 분홍색으로 탐스럽게 강조되어 있다.
일전에 천경자 화백의 직계 제자이며 2013년 한국인 대상 미술진흥 부문을 수상하신 서울대.고려대
교수를 지냈던 , 일명 보리밭 화가로 불리우는 이숙자 화백의 '이브의 보리밭' 연작을 본적이 있다.
이화백은 작품에서 가부장 사회에서 수동적, 순종적인 여성의 이미지와 다른 당당하고 도발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고져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의 창조물인 몸의 아름다움을 만개한 화려한 꽃을 볼 때와 같이 왜곡없는 시각으로 감상해 줄
것을 부탁했다. 모두가 화백의 작품을 보고 한국인의 정서가 내면에 깔린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고 했다.
우리는 '단옷날의 개울가 '란 작품에서 혜원은 왜 목욕하는 여인을 소재로 삼았고 , 그림 속의 여성의
젖가슴을 의도적일 만큼 노출시키며 그 것을 통해 전하고져 했던 의미는 무었이었을까 ?
생각해 보면 , 그것 역시도 작품 속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작품을 살펴보면 년중 가장 양기가 강한 시기에 음기의 기호 강하게 그려져 있다
젊은 여인들, 그네를 매고 있는 나무 밑둥의 옹이, 바위 모양,힘차게 흐르는 시냇가변의 파릇 파릇한
소나무 잔가지 잎들과 풀, 음양( 존재 조건) 과 오행(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치)의 숫자 등
[ 양반 유흥]
[ 선유 와 유산]
화제로 ' 一笛晩風聽不得 / 白鷗飛下浪花前 ' 라고 쓰여 있다.
늦바람 타는 대금 소리는 안들리고 / 갈매기는 꽃물결만 찾아 날라드네
갓쓴 양반 세명, 기생 3명이 배를 타고 있다. 장소는 한강, 배는 선유도 선 바위 옆을 지나고 있다.
성하의 여름인 듯, 배 위에는 차양이 처져 있다. 기녀들은 산뜻한 물빛 치마를 입고 있어 싱그러운
계절감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젊은 한양, 둘은 기녀의 어깨를 살포시 안으며 장죽을 잡아 주기도
하고, 강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기녀를 턱에 손을 괴고는 옆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주유하는 젊은이들 관심사는 피리소리가 아니라 꽃물결 찰랑이는 여인네들의 치막폭 속이 아닐지,
그런데 연배가 좀 있어 보이는 수염 기룬 양반은 뒷짐을 지고는 먼 데를 바라보고 있고 있는 모습이다.
흥없어 생각에 잠긴 이분 자세히 보면 중치막에 흰 띠를 매고 있는 것을 보면 상중인 모양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상중에도 불구하고 두 젊은이를 접대하기 위해 선유놀음에 나왔다는 이야기다.
[ 기타 풍정]
길 위에서 마주보며 이야기하고 있듯이 보이는 남자 둘과 여인 둘, 모두가 장식이 없는
흰 옷을 입고있다.
남자들이 쓰고있는 패랭이는 집안 사람 가운데 누군가 세상을 떠너면 쓰는 모자이고 여인들이 쓴
삿갓도 그렇다. 오른쪽의 삿갓을 쓴 여인은 치마를 왼쪽으로 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집 여인으로
본다. 오른쪽 여인은 치마 어임이 다르지만 얹은은 머리가 작지않은 것으로 봐서 서만같이 보인다.
부모 모두에 대해서는 지팡이를 3년상이 원칙이지만, 남자쪽만 지팡이를 짚는 1년상일 경우는
몇가지 경우가 있다한다. 시집간 딸의 경우 친정부모 모두에게 지팡이를 짚니않는 1년상을 입는다.
즉 딸의 경우는 시집쪽의 상일 때는 지팡이를 짚지만 시집기서 당한 친정쪽의 상일 때는 지팡이를
짚지않는 것이다. 따라서 왼쪽 여인은 시집에서의 상을 오른쪽의 여인은 친정집이 상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른쪽 지팡이를 짚은 쪽의 남녀는 부부이고 전면의 남녀는 남매인 것으로 추측된다.
즉 남매는 집안이 몰락한 양반집 사람으로 가세가 기울어 서민의 남녀와 결혼한 것 같다.
서양장기인 쌍륙놀이는 푸른 말, 붉은 말 각각 16개씩 있다. 주사위(투자) 2개를 굴려서 나온 숫자데로
말을 전진 시킨다. 그림은 남자가 둘, 기생 2명이 야외에서 쌍륙판을 벌리고 있는 장면이다.
그림의 오른쪽 남자는 배자만 입고 탕건을 벗어 왼편에 놓아두고 있다. 놀이 상대편인 기생으로 보이는
여성쪽의 말 두개가 판 밖으로 나와 있는 걸 보면 놀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오른쪽에 써놓은 시를 보면 '기러기 나는 울음소리 역력한데, 인적은 고요하고 물시계 소리만 아득하다'
라고 하여 이들이 쌍륙 삼매경에 빠졌음을 말해준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마지막 그림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원래 있던 '납량만흥'을 ‘주사거배’로 기회가 되면 납량만흥도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맨 왼쪽에 서 있는 ‘중노미’로 불리는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젊은이를 보세요
그런데 이 중노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네요 뭔가를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주방에 앉아 술도 따라 주고 손님의 묻는 말에 대답도 해야 되는 여주인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반 주막하고는 다른, 대청마루 같은
넓은 마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술상도 차려있지 않고, 앉아있는 손님도 없구?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 그림은
기생이 있는 기생집도 일반 주막도 아닌 선술집 풍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화화 중 선술집을 그린 분은 신윤복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중노미는, 서있는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 주다 보면 손님들이 서있는
위치도 바뀌고 그래서 헷갈려 할 주인이 따르는 , 술잔 숫자를 셈하고 것입니다.
중노미가 서있는 옆 벽에 써있는 화제는' 巨盃縣皓月 / 抱擁對淸風'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병을 끌어 안으며 바람을 상대하네’
입니다.
노란 초립을 쓰고 붉은 장의를 입은 관아의 별감이 젓가락을 들자마자 주인은
술을 따르고 있습니다. 술집 주인은 트레머리에 흰색 저고리, 푸른 치마 입고,
소매 끝동은 푸른색이고 깃과 고름은 자주색입니다.
남색 끝동은 남편이 있고, 자주색 고름은 자식이 있음을 보여주는 복색입니다.
술을 주문하면 술통에서 술을 떠 그릇에 담는데 , 이때 쓰는 국자를 ‘구기’라
합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국자로 술을 떠서 바로 술잔에 담아 주는 것이 아니라
술통앞에 있는 그릇에 먼저 담아 데워 먹는 것입니다. 청주 데워 먹 듯이.
오른쪽 두 사람 중 갓을 쓴 양반은 점잖은 체면에도 불구하고 겉 옷을 들추고
있는 모습이 아마도 술을 좀 얼큰하게 취한 것 같습니다.
담뱃대로 술을 가리키며 옆 사람에게 한 잔 더 하자고 하는 듯합니다.
일행인 듯한 사람이 흥미를 또 끄는 것은 복장이 아주 특이하네요.
망건도 아닌 원뿔 모양의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고, 겉 옷은 소매가 없고 검은
천에 하얀 실로 체크무늬를 새긴 널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런 모자를 ‘깔때기’ 옷은 ‘더그레’라 부르는데 조선의 관헌 중 이런 복장을 한 사람은
바로 의금부 나장입니다.
그러니까 맨 오른쪽 얼굴이 붉게 타오른 인물은 죄인을 문초할 때 매질 및 압송을
하는 병조 소속의 중앙 서리로 깔때기 쓰고 까치등거리를 입었으며 손에 주장을 들고
다녔다 했습니다.
얼마나 밉게 보였으면 눈은 작게 그려 독하게 보이고 눈썹은 뒤로 갈수록 높아져
매서운 인상을 풍기게 그렸습니다.
한 잔 더 하자는 옆 사람의 권유에 그만하고 가자며 말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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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22. 한바다.
참고서적
조선풍속사3 혜원 그림밖으로 걸어나오다. 2010. 강명관 도서출판사 푸른 역사
나를 세우는 옛 그림 조선의 옛그림에서 .. 2012. 손태호 한영문화사
간송 미술 36회화 우리문화와 역사 .. 2014. 백인산 (주)안그라픽스
한국의 풍속화 2000. 정병모 한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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