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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年 올해도 딱 일주일 전 동지팥죽을 상점에서 사와 부인과 나누어 먹으면서
겨울맞이(긴긴 밤)를 새롭게 했지만 방벽에 달려 있는 달력 31일자에 인쇄된 송구영신
送舊迎新 문자를 보니 세밑(歲暮)임을 새삼 실감한다.
올해 세밑은 대통령 탄핵, 내란심판 등으로 나라 앞날이 걱정스러워 다중 뉴스를 꼭
챙겨보게 되어 기억에 오래도록 각인 될 것 같다.
작금에 와 생각해 보니 중학교 3년간 기숙사 생활 시 왜 그렇게 매년 사는 동을 옮겨서
힘들고 생소한 거처에 새살림을 해야 되게 했는지 이해가 된다.
변화에 스스로 적응력을 기르고 일없으면 그냥 스쳐가던 낮선 동료 선배들과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요령을 터득하도록 하기 위한 학교측의 배려아닌 배려임을.
내년이 육십갑자 연도로 어떤 해인지 물으면 쉬 답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요즘은 생활의 중심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전화대신 새로운 소식이 메시지로 전달됨으로 어쩔 수 없이 찾아보게 된다.
생활에 필요한 데이터, 자료 등 자문할 답이 스마트폰에서 대부분 찾아 볼 수가 있어
일 처리 때문에 친구들을 만날 필요도 거의 없다고 본다면 틀린 말일까.
그런데, 연말이 오면 비육지탄髀肉之嘆란 사자성어를 대하는 마음은 어떠한가.
後漢 말 유비가 조조와 협력 여포를 하비에서 격파하고도 조조의 휘하에 있는 것이
싫어 형주 유표에게 의하던 시절, 어느날 유표의 초대를 받아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우연히 변소에 갔다가 자기 넓적다리에 유난히 살이 찐 것을 보게 되었다. 순간
그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연유를 캐묻자 유비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吾常軍不離鞍 髀肉皆消今不復騎 髀裏肉生日
月若馳老將至矣而功業不建是以悲耳.
장수가 되 능력을 발휘하여 뜻한 바를 이룬 것 없이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 그것을 슬퍼하였던 것입니다.“라고
새해 계획은 뭘 세울지 고민하다 잠시 미뤄 뒀는데 벌써 일 년이 다 지나 간다고
생각을 한 적이 한 두번 이상 있을 겁니다.
최근 내생활이 같은 일상의 반복으로 시간의 흐름에 무감각해졌다고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지만, 흐르는 똑같은 시간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왜 그렇게 쏜살같이 가버리고, 어쩔 수없이 해야 하는
일을 할 때 시간은 왜 그렇게 천천히 흐르는지, 그 동안의 연구들은 이 궁금한
이유로 나이가 들어 노화가 진행됨에 따라 쾌락 호르몬의 일종인 도파민 분비가
줄어드는 점 , 개별적인 기억들이 뭉뚱그려지는 뇌 기억이 단순화 된다는 점 ,
그리고 생체시계가 느려지는 점 등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을 제시한다.
오늘은 뇌 속에 있는 생체시계를 연구한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
최근 물리학적으로 인체의 변화를 들어다 본 연구 결과의 결론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물리학적 시계시간(크로노스)과 마음으로 느끼는 마음시간(카이로스)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마음시간은 일련의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이 이미지들은 감각기관(뇌의 시신경)의
자극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신체가 노화되면 뇌가 이미지를 습득하고 처리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자연스럽게 총체적으로는 전해오는 새로운 심상인 변화하는 이미지의
저장 등 처리 개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어 부실하게 된다는 것
미국의 심리학자 피터 맹건Peter Mangan 교수가 연구한 시간과 나이에 관련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맹건 교수는 젊은 20대 사람들과 70세까지의 나이든 사람들에게 스톱워치를 하나씩
들린 다음, 눈을 감고 3분의 시간을 마음속으로 세다가 정확히 3분이 지났다고 생각이
들 때 중지 버튼을 누르도록 했다.
그 결과 20대는 평균 3분 3초가 지난 후에 버튼을 눌렀지만 40대는 3분 16초,
6~70대는 평균 3분 40초가 지난 후에야 버튼을 눌렀다.
3분 40초를 3분으로 느꼈으니 한마디로 시간을 짧게 느낀 것이다. 이어 교수는 이런
차이가 나이에 비례해 심해짐을 보여줌으로써 나이가 들면서 우리 뇌에서 뭔가 시간
감각과 관련한 변화가 일어남을 암시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뇌 과학자들은 마음의 시간은 시간의 흐름을 사건의 축적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새로운 사건이 많았다면 같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지만 새로운 사건이 없으면
시간이 굉장히 짧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즉 나이가 들수록 생각하는 정보량이 줄어 들고 비슷한 루틴(하루 생활)이 반복되면서
에피소드로 기억될만한 변화를 보여줄 삶의 스냅사진이 줄어들어서라고 볼 수 있다고.
또 다른 미국의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 박사의 사람들의 느끼는 시간의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한 파격적인 실험을 보자.
그는 안전장치를 갖춘 놀이공원의 기구를 이용해 사람들을 50m 높이에서 뛰어내리게
한 다음, 자신이 땅에 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을 추측해 보도록 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답했으며, 또 떨어지는 데 굉장히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고 대답했다.
박사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강렬한 자극에 의한 경험이 일상적인 경험보다
훨씬 촘촘하게 기억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점은 나도 느끼는 때가 종종 있었다. 휴가철 여행하면서다.
처음 어떤 장소를 찾아가고 되돌아오는 경우다. 특히 오후 늦게 목적지 지근거리에서
도로 상의 지형지물을 유심히 살피면서 차를 몰고 갈 때면, 빗나갈 경우의 수를 모두
고려하며 오랜 시간 주행해, 목적지 도착했던 것 같은데 다음날 그 길을 따라 나와서
다른 곳으로 주행하면서 느낀 점은 이 길이 어제는 왜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지 하고.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인지한 이미지가 바뀔 때 시간의 변화를 감지한다.
즉 인간이 느끼는 시간변화는 시신경을 통해 습득한 이미지로 감지한다는 것
뇌신경 속에 있는 생체시계ⁱ(biological clock)는 생명체가 갖는 일주율, 월주율,
일년율 등의 주기성(circadian rhythm)을 말하는데, 생체시계는 뇌뿐만 아니라 신체의
각 기관과 세포에도 영향을 미쳐 개체의 항상성을 유지하게 한다..
(ⁱ : 뇌시상하부의 시신경교차상핵에 존재)
외부 자극 중에서 빛은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로, 아침에 햇빛에
노출되면 생체시계가 하루의 출발점을 그 시점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한다.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은 이유라면,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춰 숫자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 시간이고 그래서 시간 또한 인간이 정한 관념에 불과하지 않은 것일까.
실재로 우리의 시간은 속도가 일정하지 않다.
심리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속도는 각각 다르게 흘러가는 중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재미있는 일을 마주할 때면 시간이 흘쩍 지나있고, 지루하고 미적지근한
일을 할 때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말처럼, 그리고 재미있는 일과 지루한 일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본다. 아마도 우리는 서로 다른 시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타인의 시계가 아닌 나의 시계에 집중하고, 내 초점의 움직임을 살피자.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갖는 느린 시작과 끝맺음에 조급할 필요가 없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삶의 속도를 늦추려고 노력해 보자.
같은 일분이라도 같은 한 시간이라도, 더 많은 것을 기억하며 시간을 다채롭게 채워나가는
거다. 쉽지는 않겠지만 ,
그러면 같은 짧은 시간이라도 긴 이야기가 펼쳐져 시간과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고,
다양한 감정으로 범벅이 된 시간 속에서 조차 여유를 찾아 볼 수 있게 되겠지.
우리의 뇌는 주어진 시간이 곡선이 아니고 직선인 것을 곧 잘 망각하는 실수를 범한다.
실재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직선이 아닌 원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의 뇌는 패턴이 반복되는 비슷한 일상의 연속으로 느끼면 시간의 흐름이 원의 테두리를
따라가는 것 같아 내가 알던 길이 다시 나오는 과거의 반복으로 잘못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은 이미 알고 있다는 편견을 낳는 인식의 맹점에 빠진다는 것.
왜냐면, 365일(일년), 30일(한달), 7일(일주일) 리듬이 마치 우리는 주기를 정해 같은 요일과
날짜를 반복하고, 비슷한 일정을 비자위적으로 매일같이 만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사는 공동체의 일상 체계에 맞춰 숫자를 세다보면 실재 시간이 직선임을 망각하고
시간을 원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시간이 지나는 직선의 테두리는 어떤 지침도 없이 흰 바탕을 가로지르듯,
매 순간이 현재이고 우리의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되돌아 갈 수 없다.
반복되지 않는 시간은 직선이고, 새로운 앞을 향하여 매 순간 나아가고 있지 , 그 방향은
돌고 도는 원처럼 회전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시간이 직선으로 흐름을 인식하고, 내가 그리는 삶의 선을 애끛게 (액+궃다)
이미 그은 선 위를 지나가기 보다 , 새로운 선으로 흰 바탕을 칠하는 중임을 알자.
매 순간은 모른다. 앞으로 내 삶의 스케치가 어떻게 뻗어 나가고 어떻게 변화시킬지, 그 앞을
알 수 없음은 이제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이 두근거림, 새로운 경험을 기다리며 설렘을 갖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도 생겨나지만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게 한다.
비슷한 일상의 연속, 즉 생계를 위한 일상의 반복으로 삶의 희노애락에 무덤덤해지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만큼 설렘과 기다림이 있는 이벤트가 나이가 들수록 사라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습관이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삶의 패턴이 원인이 된 굳어진 습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길들여진 습관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 눈에 띄는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 한다.
도전할 중단기 계획과 분명한 목표를 정해 자신을 시간의 쳇바퀴 속에서 꺼낼 용기가 필요하다.
작심삼일이 되지 않으려면 우선 배움의 도전이 선행되어야한다.
도전도 질문처럼 알아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계절의 변화를 알려면 등산 동우회에 가입부터
해야 한다. 같은 취미의 동호인과 같이해서 쉽고 사계절의 숲과 지방 사람의 삶의 모습도 보인다.
습관도 조금씩 바꾸는 게 좋다. 예전에 즐겨했던 것을 찾던가,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것을 찾아서
해보자. 모든 것이 귀찮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빨리 보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전 사회로 나와
취준생으로 연속 도전했던 때를 생각하며 그 이후 무엇에 도전했고 그 결과를 일기에 적어 보자.
앞서서 자연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가 객관적인 물리적 시간이라면
우리가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시간 감각을 카이로스(kairos)¹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마음으로 느끼는 마음의 시간인 카이로스에는 ‘기회의 신’이란 의미가 있다.
(¹ : 크로노스: 제우스의 父, 카이로스: 제우스의 子 )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남성)’으로 불렸고 , 로마 신화에서는 오카시오로
불리워지던 기회의 신(여성)이 있었다. 물론 동인한 신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것이다.
앞머리가 길고 풍성한데 비해 뒤쪽은 민머리이고, 등과 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카이로스의
외양으로 한 손에는 저울을 ,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그래서 카이로스를 잡으려면 하면, 마주하고 있을 때 머리채를 붙잡아야한다.
뒤돌아 날아가려할 때 잡으려면 잡힐 것이 없다. 그리고 한 손에 저울을 들고 있는 이유는
기회가 있을 때 저울을 꺼내 정확하게 판단하라는 의미이고, 또 다른 손에 쥔 날카로은 칼의
이유는 때가 왔을 때 결단을 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기회는 시간 상 왔을 때 잡지 않으면 달아나버린다는 것과 잡더라도 신중하지만 망서림 없는
결단의 과정을 거쳐 취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찾아 경배하려던 이 신 오카시오(occasio)란 단어에서 이 것을 어원으로
우리가 말하는 기회(occasion=opportunity)가 나왔다.
원래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 질이 다르고, 기회는 불공평한 법이란다.
그래서 보통 사람에게는
1. 기회는 기다려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 다녀야하는 것
2. 준비된 자만 기회를 잡는다.
회사로 예를 들면, 그럴 듯한 회사와 그런 회사는 다르다. 전자는 가설, 후자는 사실
3. 기회는 다른 무엇보다 타이밍이다.
생각이 많으면 용기를 잃기 쉽고 생각이 없으면 무모해 진다.
본론으로 되돌아가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시간을 늘이는 또는 느리게 가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고정된 틀에 익숙해져 단조로운 시간의 구성으로 일관되던 루틴, 습관의 틀에서 벗어나
낯선 경험으로 가득한 세상을 접하는 어린이의 시선으로 새로운 것, 안 해보던 것을
시도하는 다양한 단위시간 활동이 쌓이고 그것들 중 성향이나 취미에 맞는 활동이 쌓인다면
뭔가 지향하던 일이 이뤄지기도 하고, 적어도 시간을 길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이 된다.
방법을 찾아 요령이 생기면 길건 짧건 자투리 시간들을 모아 해낸 일들에 만족을 느끼고
삶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보게 된다는 것.
단조로운 시간의 구성은 시간을 더 빠르게 흘려보내게 된다.
같은 시간,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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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28.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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