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나/나의 이야기

사군자 중 조선 묵란의 흐름

haanbada 2024. 10. 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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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계란 <가칭> 난주 1982년도부터 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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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군자

   군자라는 말은 공자 이전에는 '정치하는 귀족 계급 일반'을 지칭하는 지위

   또는 신분을 나타냈었다.

   군자란 유교에서 지향하는 이상적 덕목을 갖춘 인간상으로, 

    곧 선비정신을 간직한 고결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인 군자의 의미를 사물에 적용시켜 각각 그 생물의

   생태적 특성을 군자를 지향하는 문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군자의 근성을 닮은

   식물도 군자라 일컬었다.

* 매화- 어려운 조건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군자나 지사, 세속에 초월한 은자,

           또는 지조있고 고상한 여인을 비유하기도 한다.

* 난   - 산중에서 비와 이슬을 받아 살면서도 빼어난 잎에 고운 꽃을 피우며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내보낸다.

           본성은 바람과 물을 좋아하지만 이 또한 지나친 것을 꺼리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난의 특성에서 옛 문인들은 중용의 도를 지키는 군자의 품성을 보게

           되었다. 산속에 홀로 피어있으면서도 스스로 절제하는 향기로운 삶은 군자의

           삶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 국화- 가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모든 꽃이 피었다 지고 없는 늦가을,

           그제서야 조용히 서리를 맞으며 피는 모습에서 어려움 속에서도 소소한

           기품과 절개를 지키는 군자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 죽   - 칼날 같은 눈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는

           한결같이 군자를 닮았다.

           매란국죽 이라함은 용어 순서 속에 사계절에 맞추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  유래

     원래 뜻이 높은 네 사람을 일컫는 말로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에서 유행하였다.

     당시 제나라의 맹상, 조나라의 평원, 초나라의 춘신, 위나라의 신릉 등

     네 군자는 모두 밝은 지혜가 있으면서도 충성스런 믿음이 있었고, 관대하고

     후덕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현자를 존경하면서도 선비를

     중히 여겼다 하여 사람들이 이들은 사군자라 불렀다.

     매·난·국·죽을 사군자라하고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된 것은 중국 명나라 말기

    (16세기)말에 이르러서다.

     다만 사군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들 네 식물을 한데 묶어 다룬 최초의

     문헌이 명대에 발간된 「매죽난국사보(만력 48년 1620년)」라 할 수 있다.

  - 서문을 쓴 진계유(1558~1639)가 서문에 매죽난국 사군자라는 표현을 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 변신하는 것을 능력과 미덕으로 생각하는 오늘날,

     매란국죽이 지닌 불변의 지조와 절개를 귀하게 여긴 옛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그림 속에서 음미해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다.

 

 

 ▻ 난을 좋아한 중국의 문인 화가

 

  * 공자孔子(BC551~BC479) : 난 문화의 근원인 2500여년전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에 얽힌 고사 공곡유란空谷幽蘭 의란조猗蘭操

 

     習習谷風光陰以雨   습습풍속광음이우

                                 골짜기바람 살랑대며 부니 날 흐리다가 비까지 내리네

     之子于歸遠送于野    지자우귀원송우야

                                 가던 길 다시 가려하니 저 먼 들까지 배웅 하누나

     何彼蒼天不得其所    하피창천부득기소

                                 푸른 하늘은 어이하여 날 버리는가

     逍遙九州無有定處    소요구주무유정처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도니 오갈데 없는 신세로다

     世人闇蔽不知賢者     세인암폐부지현자

                                  세상 사람들 어둡고 마음이 막혀 어진 이를 몰라 본다네

     年紀逝邁一身將老    년기서매일신장로

                                  세월은 빠르게 흘러가고 이 몸만 늙어 가는구나.

 

     - 猗蘭操에 관한 기록은 한나라 사학자, 문장가인 채옹 (蔡邕,133 ~ 192) 의 글

     『금조琴操』에서 찾아진다.

 

      <唐 문장가 한유(韓愈768 ~824)의 유란조幽蘭操/ 의란조猗蘭操>

               공자의 심정을 헤아려 이를 모방하여 의란조를 지었다.

 

        蘭之猗猗 揚揚其香          아름다운 난초가 있어

                                           그 향이 바람에 흩날리네

        衆香拱之 幽幽其芳          뭇 향기를 거두어 품은

                                           그윽한 향기로움이여

        不采而佩 于蘭何傷          꺾어 다는 사람이 없은들

                                           난에게 무슨 모자람이 있을까

        以日以年 我行四方          날마다 또 해마다

                                           나는 천하를 떠돌았네

        文王夢熊 渭水泱泱          문왕이 꿈 속의 곰을 만났던

                                           위수 물은 깊고 아득한데

        采而佩之 奕奕淸芳          꺾어 달아주는 이가 있다면

                                           맑은 향 일월처럼 빛날 것을

        雪霜茂茂 蕾蕾于冬          눈과 서리 가득해도

                                           겨울에 봉오리 피워내듯

        君子之守 子孫之昌          뜻을 지켜내는 군자는

                                           그 자손이 창성하리라

 

      중국 남북조시대 진나라의 승려 지장智藏(735~814)이 편찬한 역대

      시문집 「고금악록古今樂錄」에 수록되었다 한다.

 

     문답집인 「공자가어」에 난초= 군자의 표상으로 기록됨

      芝蘭生於深林 , 不以無人以不芳, 君子修德入道, 不爲困窮以改節

      지초와 난초는 깊은 숲에서 자람에 사람이 없어도 꽃을 피우며

      군자는 덕을 닦아 도를 세움에 곤궁하다고 절개를 바꾸지 않는다.

 

     蘭이 충성심과 절개의 상징으로 확립은

  * 시인 굴원(屈原BC343~278)에 의함 이름는 평, 자는 원

    장편서기 「이소離騷」에서 그가 구원의 땅에 난을 심었다는 데서 시작됨.

    초나라의 희왕懷王과 충돌하여 물러나야했던 실망과 우국 충정을 노래함

    이소= 조우 : 근심을 만나다.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은 충신

 

       余既滋蘭之九畹兮     여기자란지구원혜

                                    /나는 이미 구원의 난초를 기르고/

       又樹蕙之百畝            우수혜지백무

                                    /또 백무의 혜초도 심었다/

       畦留夷與揭車兮         휴류이여게차혜

                                    /유이와 게차를 밭두둑으로 나누고/

       雜杜衡與芳芷            잡두형여방지

                                    /두형과 방지도 섞어 심었노라/ 

 

           - 이때의 난은 국화과의 택란 향초를 말함.

 

     지금의 난은 송나라부터

  * 원나라 초기 문인 정사초鄭思肖(1239~1316) 송이 망하고 몽고족의 원나라

     세움에 뿌리 없는 노근란 그림 = 절개의 상징성 강화 , 여기서 난= 조국

     송나라 왕가의 성인 趙에서 초肖를 취함   

     송나라 황제의 姓인 ‘조趙’를 생각한다는 뜻으로 사초思肖라 개명했다.

     망국의 아픔이 녹아있고 절조가 잘 반영된 정사초의 「墨蘭圖」의

         제시 題畵詩

      *

      向來俯首問羲王            머리 숙이고 복희임금에게 물어보았네

      汝是何人到此鄕            당신이 누군데 이곳에 왔느냐고

      未有畵前開鼻孔            그림을 그리기 전엔 콧구멍이 열었었지

      滿天浮動古馨香            그 땐 온 하늘에 옛 향기를 마음껏 마셨었지

      花開불幷百花叢             꽃은 피었지만 여느 꽃과 섞이지 않네

       獨立疎離趣未窮           듬성한 울타리 밑에 홀로 피었지만 그 자태 아름답고

       寧可枝頭抱香死           가지 끝에 향기를 품은 채 생을 마감할지라도

       何曾吹落北風中           모진 북풍에 떨어져 뒹구는 일은 없을 꺼다.

 

      愛好 역사에 비해 墨蘭으로 그려진 것은 다른 식물에 비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본다. 중국에서도 묵란화의 역사는 대체로 원나라 때 문신 조맹견과

      정사초의 난화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편이다.

      원나라 초기 뿌리가 드러난 露根蘭으로 애국심을 표현한 정사초,

      조맹부(趙孟頫1254 ~ 1322)의 아들 조옹(1289~?) 등이 묵란으로 이름이 있다.

 

 ▻  묵란으로써의

 

     중국 송나라 등춘(鄧椿1127~1189)의 회화 이론서 화계畫繼, 10

     미불(米芾1051~1107)이 소개되었다. (1074~1167년까지 화가 219명 기록됨)

     “ 미불의 그림 두점을 보았다.그 하나는 매화,소나무,난초,국화가 한 종이에

     그려져 있었는데, 가지와 잎에 서로 교차하였으나 어지럽지않았고.

     번잡한 듯하나 간소하며 소흘하거니 방만하지 않았다.

     매우 고아하며 기이하며 실로 광대한 기작이었다."

 

      菊竹이 사군자로 그림이 표현되기 전까지인 12세기 중엽에 이미

      란국화가  한폭의 그림으로 그려졌다.

     대나무가 그려진 사군자는 중국 명나라 말기(16세기말)에 이르러서다.

     물론 이전에도 함께 그려졌겠지만 다만 사군자란 용어를 사용하여

     이들 네 식물을 한데 묶어 다룬 최초의 문헌이 명나라 때 발간된

    『梅竹蘭菊四譜』라 할 수있다. 만력 48년(1620)에 만들어진 ‘매죽란국사보’

      는 梅.竹.蘭.菊畵 4종의 화법을 설명한 것이다.

      이 화보에 서문을 쓴 진계유(陳繼儒1558~1639)는 서문에서 ‘매죽난국

      사군자’라는 표현을 써서 이 넷을 묶어 최초로 사군자四君者라 불렀다.

      1697년 초집 발간에 이어 1971년 2집이 발간된 ‘『芥子園畵傳’』에는 난보,

      죽보, 매보, 국보가 편성되어 있다.

      이 화보에서는 직접 사군자란 표현은 없었다.

 

 ▻  조선의 애란인

 

 *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방으로 들어가니 난초 향기가 풍긴다.

       붓 잡고 시 한 수 휘두른 다음

       수없이 권하는 술에 흠뻑 취했네

 

 * 강희안(姜希顔, 1417~1465) 세종31년 간행된 원예서 「양화소록」

    " 우리나라에는 난혜의 종류가 많치않은데 분에 옮긴 후 잎이 점점

       짧아지며 향기 또한 겨우 나는 정도여서 국향의 뜻을 잃는다"

 

 * 조선 중기 문인 퇴계 이황(李滉, 1501년 ~ 1570년) 의 ‘ 幽蘭

      유란이 在谷하니 자연히 듣기 좋고

      백운이 在山하니 자연히 보기 좋네

      이중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욱 잊지 못하네

 

 * 18세기 유박(1730~1787)의 화암수록花庵隨錄에 방우로 기록됨

    몰락한 명문가 후예로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평생 원예에 몰두

    화암수록은 강희안의 ‘양화수록’에 언급한 식물 외에 정원에 심는 식물과

    과수도 다수 포함됨 그는 자기 거처를 백화암百花菴(많은 꽃이 있는 집)과

    우화재寓花齋(꽃이 머무르는 집)라고 이름 지었다.

 

  ►   조선의  사군자

 

     매란국죽을 그린 그림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나 사군자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十省堂 엄흔(嚴昕,1508~1553)의 ‘십성당집十省堂集’ 중에 춘란, 하죽,

     추국, 동매라는 제목으로 쓴 시가 있다.

       춘란 春蘭

       적막한 산속 처사집에

       마음속에 자란 화 피어있음을 알겠네

       예로부터 빈 골짜기에는 가인이 있다고 하니

       이소경을 읽으며 가는 봄을 아쉬워 말아야지

       하죽 夏竹

       <생략>

 - 현존 작품 중 사군자가 함께 다루어진 가장 이른 예는 조선 중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작자미상의 <四君子山水八幅屛風>이 있다고 한다.

   우청又淸 황용하( 黃庸河 1899~1965)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매란국죽

   순서로 각각 2폭으로 이루어진 8폭병풍< 四君子山水八幅屛風>]이 있다.

          題畵詩

        1폭 제2폭 매화

       제3폭 제4폭 난초

       제5폭 제6폭 국화

       제7폭 제8폭 竹화 

 

      제3폭 居貴高能下 値儉在自持 此石日或可轉 此根終不移 

                    귀한데 처하여 지위가 높으나 능히 스스로 낮출 수 있고‚

                    어려운 처지에도 스스로 지킬 수 있네. 이 바위는 혹 굴릴 수 있으나‚

                    이 뿌리는 끝내 옮길 수 없네.

 

      제4폭 雪草生渙山 난花滿幽壑 ?生絶世皺 以待?者作

                   설초는 깊은 산에서 자라고 난 꽃은 그윽한 골짜기를 채웠네.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자태‚ 왕자를 기다리며 그렸네.

                                  * 순천대박물관 소장

 

   - 사군자가 매란국죽을 가리키며 직접적으로 사용된 것은 언제일까?

     출판가 '한철희韓喆熙대표는 1920년경 일제강점기 초기로 본다.

     1922년부터 시행된 ‘조선미술전람회 규정’이 그 근거이다

     전람회에서 사군자를 규정하여 “주로 먹을 사용한 간단한 그림“이라

     설명을 덧붙였다.

 

▻  묵란화의 전개

 

 1. 문헌상

 

  *  15~17세기 난 그림( 절제된 엄숙미)

    고려말 조선초

     陽村 권근(權近,1352~1409)의 아들 권도가 편찬한

     < 陽村集 40권7책 목판본>에 실린 ‘주이배지사화설’에

       승려 축분이 그린 <난죽매혜병풍>을 보고 쓴 글 : 난과 혜가 그려짐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쓴 < 春亭集>에 옥서침玉瑞琛의 묵란화를

     보고 읊은 시를 보면 한 폭의 그림을 수중히 여김이 보임

    수홍 윤삼산(尹三山, 1406~1457)의 묵란화

         옥서침( 玉瑞琛 1406~1457) 의 묵란화

 

     * 조선대의 미술에는 전성기가 두번 있었다.

       한번은 세종 때부터 성종 연간의 약 80년 동안으로 조선시대 미술의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때로, 이 때는 조선의 국수적인 풍조로부터 중국적인

       방향으로 산맥이 옮겨갔다고 할까, 국내적인 화풍에서 국제적인 화풍으로

       옮겨간 시기이다.

       두번째가 화원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는 영조 말부터 정조연간, 순조 초반

       약 80년 가까이 된다. 

         조선사회의 부 축적과 미술의 수요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정조시대에는 난전이라는 육의전 이외에도 시서화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장사꾼들이 생겨나  기존 권문세가는 물론  새로 등장한

       부를 이룬, 신분상승의 욕구를 갖는 상인계층과 자본가의 수요에 응한다.      

     

    * 세종실록 109권에 세종27년(1445) 세종이 친히 난竹을 그린 병풍을

        전 형조판서 신인손辛引孫에게 하사하다란 기사가 나옴   

     * 조선 중기 탄은 이정,  화원화가 이징(1581~) ,선조의 <묵란(목판화)>

       이정의 <난초도>는 검은 비단에 금물로 바람에 날라는 난초 한 포기 묘사

       영조 35년(1759) 선조,인조, 효종,숙종, 영조의 어필을 모와 목판본으로 새겨

       찍은 <어제첩>에 실린 것으로 선조의 <난죽도>가 유일한 그림.

       이징의 <묵란> 선조대에 그린 것은  중앙국립박물관에 있다.

   신경준(申景濬, 1712~ 1781)숙종 38~ 정조 5    여암유고旅菴遺稿에

        '我國齊州獨蕙蘭'란 기록이 보임= 일경구화 제주한란 지칭

 

 *  18세기 후반기 난 그림( 閭巷文人  중서층  서화계 변화)

     중국 명나라말 진계유가 서문을 쓴 ‘매죽난국사’의 발간

    <십죽재서화보>, <개자원화전> 조선에 전래된 영향 

    강세황( 姜世晃, 1713년 ~ 1791년 )의 묵란 ‘개자원화전’에 소개된 난법

        충실히 따름

     <사군자팔곡병>. 종이에 수묵, 68.9x 48.3cm 중 묵란

     <난매죽국> 1781 종이 수묵 25x 271.5cm 개인소장 

    김정희 金正喜(1786~1850) 정조10년~ 서화가, 호는 阮堂, 秋史, 玄蘭

      <묵란도 화제> 묵난을 그리는 법과 마음가짐

      此鳳眼象眼. 通行之規. 非此. 無以爲蘭. 雖此小道. 非規不成. 況進而大於是者乎. 

      是以. 一葉一瓣.自欺不得. 又不可以欺人.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是以.

     寫蘭下手. 當自無自欺始.

    조희룡 趙熙龍(1797~1859)정조13~고종3   자는 치운, 호는  우봉

     <묵란> 종이 수묵 22.7x 27.2cm 개인

     <묵란> 종이 수묵29.6 x 35.5cm 국립중앙박물관

 

 * 19세기 난그림(묵난의 전성기)

     허유許維 (1809~1892 허련許鍊)순종29~고종29 호는 소치

        <석란> 종이 수묵 26.0x 55.6cm 개인

    신헌 申櫶(1810~1888) 순조10~ 고종25 호는 위당 무관 서화가

    이하응 李昰應( 1820~1898 순종20~광무2) 흥선대원군 호는 석파

    김응원 金應元 1855~1921 철종6~ 호는 소호

    민영익 閔泳翊 1860~ 1914 철종11~ 호는 운미

 

 2. 조선의 묵란 작가

 

 ►  15~17세기( 신분제에 따른 절제된 엄숙미)

 

 이정 (李霆,1541~1626) 중종36~인조4  호는 탄은, 시서화에 삼절

     특히 대나무 그림에 뛰어나 명성을 떨침. 조선왕조 5백년을 통해

     묵죽의 재1인자로 꼽힌다.

 

  <草圖> 조선 17세기, 비단에 금니 21x15.5cm 국립박물관   

 

     그의 작품은 조선 초기의 양식에 비해 새로운 양식을 가미하며

   먹의 농담을 통해 화면의 깊이를 조성하는 근대기법을 닮았다.

   국립박물관 소장 난은 검은 비단 위에 금물로 그린 작품이다.

   잎새가 가늘고 시원스럽게 뻗어 올라가면서 허리가 가늘어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탄은의 <난초도>는 검은 비단에 금물로 바람에 날리는 난 한 포기를

   묘사한 것이다.

   이 난 그림은 우측 하단 지면에서 부터 화면을 꽉 채운 대각선 구도를 보인다.

   비스듬히 길고 매끄럽게 뻗은 난엽은 좌우대칭으로 균형을 이루고 중간 중간

   삼전법으로 끊어질 듯 이어져 보일 만큼 필선의 굵기에 변화를 주었다.

   방사 형태로 뻗은 잎은 시원스러운 리듬감이 있다.

   잎 사이에 짧게 세 송이 꽃을 그려 넣었고, 난 꽃은 정세하고 강한 필선으로

   꼼꼼하게 묘사하였다.

 

   <형란>荊蘭  비단에 금니 25.5 x 39.3cm 간송미술관   

 

   난은 강직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장점으로 , 찬 서리같은 절개보다는 우아한

   정취를 담아내기에 적합하다.

   그런데 이 <형란>은 조금 다르다. 강하고 굳세다. 억세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난은 꽃대 하나에 여러 개의 꽃(일경구화)이 달리는

   혜란을 그렸다. 화면 왼쪽에 자리한 가시나무는 소인을 상징한다.

   난의 기세가 어찌나 강한지 가시나무의 포악함을 완전히 압도하며,

   꽃대와 꽃의 묘사도 사실성을 크게 해치지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직선적으로

   처리했다.

   검은 바탕 위에 금색의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난잎과 꽃잎은 마치 밤하늘을

   가르는 황금 검처럼 우아하고 강렬하다.

 

 이우 (李瑀,1542~1609) 중종17~광해군1   호는 옥산

   죽와 신사임당의 넷째 아들, 광해군 초에 군자감정을 지냈다.

   옥산은 1565년(명종 20) 진사에 입격하여 비안현감, 괴산군수, 고부군수를

   역임하였으며 벼슬이 군자감정에 이르렀다.

   사임당의 막내 옥산은 유별 어머니의 솜씨를 이어받아 시·서· 화·을 

   다 잘하여 사절이라 불리었다. 율곡이 평소 막내아우를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까닭도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솜씨를 그대로 보는 듯 싶어서였을 것이다.

  <묵란> 종이에 수묵   43.6x30cm    삼성미술관   

   

   이우 작품의 난 잎새는 매우 기운이 넘치고 있으며 줄기의 옅은 먹선이

   입체감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바람을 타고 너울대는 난에서 번져 오는

   운율감은 그의 거문고를 타는 선율을 듣는 듯하다고 한다.

   바람에 날리는 잎새지만 꺽임이 없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묵란화 가운데 제작 시기가 가장 이르면서 조선 중기

   묵란화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어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선조(1552~1608) 조선 14대 왕. 후궁 ,허상근부인의 3남, 인순황후의 양자

   조선 초, 중기 왕공사대부들 사이에 묵란이 즐겨 그려졌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선조의 <난죽도>가 목판화로 전해져온다.

   영조 35년에 선조, 인조, 효종, 현종,숙종, 영조의 어필을 모아 목판본으로

   새겨 찍은 <어제첩>에 실린것으로,여기에 실린 임금의 작품 중에는

   이 <난죽도>가 유일한 그림이다.

   이 서화첩의 묵란에 대해 김정희는 "우리나라에는 난을 치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선조의 어화를 배관한바 천기의 재주를 지녀 잎사귀와  꽃의 격식이

   정사초의 법과 흡사하다"라고 하였다.

   선조 임금의 천품처럼 난 그림도 격조 있음을 말하였다.

   또한 난을 통해 나라 잃은 한을 표출하였던 정사초의 난 그림과도 비교하였다.

 

  <난죽도> 조선 16세게 목판본 48.0 x 58.4cm

 

   선조의 난은 가늘고 날렵한 느낌을 주는 긴 잎과 세 송이의 꽃을 그린 

    간결한 구성 등은 정사초의 난 그림과 비교된다.

   그러나   정사초의 난이 지면을 그리지 않은 것에 비해 간략하게나마 지면을

   표현하였고,  꽃송이가 크게 그려져 실제 난화와는 달리 무거운 느낌을 준다. 

     (중부 지방은 일경구화가 자생치 않아 그런지 꽃과 꽃대가 원추리를 닮음)

 

 이징(李澄,1581~ 선조14년) 호는 허주 조선 중기 대표적인 산수화가

    중국 송.원나라의 산수화법을 견지하며 조선 전기의 전통적인

    화풍을 혼용한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고전적 단아함에서 날렵함이나 시원함 보다는 안정감과

    엄숙함을 추구한 듯하다.

    왕족출신 사대부 화가였던 이경윤(1535~1611)의 서자, 삼촌인 이영윤도

    당대를 대표하는 선조대의 화원화가.

    일화에 그림에 대한 열정이 어려서부터 유별나 , 다락방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집에서는 사흘 동안 그를 찾아다니다가 겨우 발견했다고 한다.   

    부친 낙파가 화가나서 볼기를 치니, 흘러내리는 눈물로 새를 그렸다한다.

  

   <묵란도> 국립박물관   17세기 종에 수묵    29.8x20.cm   

 

   화면의 오른쪽에서 사선 방향으로 난초 잎들이 펼쳐지고 사이 사이 꽃을

   피우고 있고, 난 옆에는 가시나무가 함께 그려져 있다. 가시나무는 여린

   난잎의 연약함을 보강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이라기도 하고

   소인을 상징하는 가시나무와  함께 그려, 난의 군자적 상징성을 돋보이게

   하려하는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난죽병도> 6폭 병풍 하나 비단에 수묵 116x41.8cm    개인   

   

    원래 그림은 모두 7폭과 발문 한 폭으로 총 8폭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 두 폭은 유실되어 총 6폭이 전하고 있다.

    바위 틈 대나무와 함께 난, 난잎을 길고 여러 송이 꽃이 핀 꽃대가 올라와 있다.

    잎은 짙고 옅은 먹의 변화를 주어 부드럽고 단정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징 묵란의 특징인 고전적인 단정함, 정연한 질서 그리고 권위와 엄숙성을

    강조하기 위한 감성의 절제 등이 잘 나타나있다.

    < 유언직 尹彦直 이 그린 난죽도 8폭 평풍을 100년이 지난 후 이징이 모사 한것>

    제시는 당시 병조참지를 지낸 명필 월탄 이현(1584~1637)이 해서로 쓴 것 

      <제5폭 제시>     

      幽芳誰共賞     유방수공상      그윽한 향기를 누구와 함께 감상할까?

      高節衆同猜     고절중동시      높은 절개를 무리들이 함께 시기하네.

      所以隱君子     소이은군자      그런 까닭에 은거하는 군자는

      孤懷倚此開     고회의차개      외로움을 품으며 이렇게 피는 것에 의지한다네.

 

 18세기 그림 (다채로운 변화 속 격조) 

        

▹ 심사정(沈師正, 1707~1769 ) 호는 현재, 묵선  본관 청송

    일찍부터 정선의 문하에서 그림을 공부하여 중국의 남화와 북화를

    종합한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현재의 사군자화는 국화에 펀중되어 난을 그린 쏨씨를 엿볼 수있는 

    작품은 찾기 어렵다.  석재는 문인보다는 화가에 가까웠던 문인 화가다.

    <석란>은  묵화의 매력을 맛볼 수있는 그림이지만 그것으로 그치지않고

    서정적인 정취를 아울렀다. 그래서 사군자화에서 보는 '군자' 다움은

    느끼기 어렵다.

     사군자는 서예적인 필치로 군자의 상징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난도 하나의 아름다운 화초일 뿐이다는 생각에서 그린 그림이다.

     <석란>  종이에 채색  32.5 x 26.5cm    간송미술관       

 

    괴석과 난을 그린 기본적인 형식은 <개자원화전> 같은 청나라 화보를

    참고 한듯 보이나 형식적이고 딱딱한 화보 속의 그림과는 다르다.

    물기를 듬뿍 머금은 붓으로 무심한 듯 잡아낸 바위의 윤곽선은 단순해

    보이지만 담백하고 자연스럽다.

    난잎과 꽃이 바위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느데 그 모양새가 매우 독특하다.

    좌우 대칭으로 벌어진 난잎과 날카로운 직선으로 표현된 꽃을 특징으로

    하는 기존의 난 그림과는 다르다.  사군자의 주된 정조와 미감이라 할 수

    있는 강경하고 집약된 기세를 찾아 보기 어렵다.

    난을 그리는데 기존 방식에 구애받지 않고 떠오르는 감흥을 손이 가는데로

    붓끝에 실어 그리는 행위 자체를 즐겼다는 생각이 든다.

 

이인상(李麟祥, 1710년 ∼ 1760년) 숙종31~영조36 호는 능호관   

   현감 벼슬을 거치고 평생을 산수와 벗하며 격조 높은 풍류인으로 빼어난

   화업을 남긴 여기 작가이며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이라 일컬었으며

   글씨는 전서가 뛰어났고 그림은 산수화와 난초를 잘 그렸다.

   서자 출신으로 불우한 사대부 가문이었지만 모습이 학과 같고 천성이

   소탈하여 욕심이 없는 사람으로 추사는 글씨와 그림 모두 문자기를

   두루 갖추었다 칭송했다.

    그림에는 사실과 사의가 있다. 사실은 실재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의미라면 사의는 단순히 사물의 외관만을 취해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뜻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그리는 그림이다.

   따라서 사실의 객관적 정밀성을 구하지 않는 대신에 자신의 뜻이 표출되는

   것을 바라는 그런 독특한 입장이다. 능호관이 그런 사유의 대가였다고 한다.

 

<묵란> 종이수목 21.0 x 27.4cm 간송미술관   

 

  화폭에 아무런 배경도 없이 안 한 포기를 그린 그림으로 능호관 회화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독특한 그림이라 한다.

  하단 중앙의 한점에서 시작하여  여러촉의 난 잎과 꽃이 마치 꽃다발처럼

  화면 가득 펼쳐있다.

  난의 잎과 꽃은 짙고 옅은 먹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시원스럽게 쳐 올렸다.

  길고 짧은 난 잎은 담백하면서도 탄력이 있고 느슨한 듯 꿈틀거려

  거침이 없다. 흐드러지게 핀 하단의 꽃들은 조심스럽게 운필하여 언뜻

  미숙하게도 보이지만 안 잎의 유연함과 대비를 이루며 생동감을 주고 있다.

 

 강세황 (姜世晃,1713~1791) 숙종39~정조16   호는 표암 자는 광지

     본관은 진주  조선 후기의 문신 · 서화가.

     일찍부터 글씨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

     열중했으며 이익 · 심사정 등 명사들과 두루  교제했다. 

     61세 때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66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

     한성부 판윤 등을 두루 거쳤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대한

     평을 해 화단의 총수역할을 담당했고, 나아가 진경산수화를 발전시키고,

     풍속화와  인물화를 유행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특히 새로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18세기 예원의 총수로 표암은 전서, 예서를  비롯하여 각 서체에 능하고

     사군자에 능하였다.

     강세황이 난초 그림은 부드럽고 깔끔한 분위기가 특색이다.

     잎새를 연출하는 공간 분할, 옅은 먹으로 사이사이 배치한 꽃잎과 땅을

     암시한 옅은 먹의 풀잎들의 조화는 뛰어난 조향감각을 보여 주었다.

 

    <사군자팔곡병>. 중 묵란    종이에 수묵, 68.9x 48.3cm      

   

      난 잎이 자연스럽게 휘어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위해 운필 중간에 약간 힘을

      주었다가 뺌으로 도톰하게 보이기 위보이도록 하는 것 :당두,

      잎끝을 뾰족하게 빼는 것:서미, 두 잎이 교차할 때 이루는 모양 :봉안 등

      개자화전의 난법에 충실히 따름.

      표암의 묵란은 잎을 지나치게 빠르게 그리거나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대여섯개의 잎과 몇 개의 꽃으로 담담하고 소박하게 그렸다.

      18세기 예원의 총수로 강세황은 전서, 예서를 비롯하여 각 서체에 능했고

      사군자에도 능하였다.

      강세황이 난초 그림은 부드럽고 깔끔한 분위기가 특색이다.

      잎새를 연출하는 공간 분할, 옅은 먹으로 사이사이 배치한 꽃잎과

      땅을 암시한 옅은 먹의 풀잎들의 조화는 뛰어난 조향감각을 보여 주었다.

 

    <난매죽국> 1781 종이 수묵 25x 271.5cm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오른쪽으로부터 맨 먼저 난, 그 옆에 매화 한 가지를 그리고 바위틈에

      난 대나무와 국화 한 포기를 그렸다.

      여기에 그려진 난은 아래쪽에서 왼편 위쪽으로 비스듬히 물러나듯

      두 포기가 나있다. 긴 화폭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한 배치이다.

      난 잎과 꽃은 중간 정도의 먹으로 크게 농담의 변화없이 그렸고

      꽃의 화심만 진한 먹으로 찍었다.

 

 윤제홍 (尹濟弘1764~ 영조40~) 문관, 화가 호는 학산

      1794년(정조18년) 문과에 급제 승지를 지냈다.

      간결한 필치로 산수화를 잘 그그려 특이한 격조의 화풍을 세웠으며

      당시 전서와 예서를 잘 쓴 유환지와 함께 명성이 높았다.

       <난죽괴석도>는 그의 독특한 필운을 보여주고 있으며 담담한 가운데

      빼어난 기픔을 보여 주고 있다.

     < 묵란> 종이 수묵 25 x 48cm 개인소장     

  

 임희지 (林熙之, 1765~ 영조41년) 호는 수월헌

      한역관으로 봉사를 지냈다.

     18세기가 낳은 감각파 산수화가로 기개가 있고 술을 좋아했으며 피리를 잘 불었다.

     그림은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 특히 난초로 유명한 강세황보다 낫다는 평

     그는 대나무 그림에서 파격을 거리낌없이 시도했으며, 난초 역시  새로운 장을 열었다.

     고대박물관에 소장한 난은 세 줄기 잎 새의 날카로움과 나머지 잎 새의 거칠음은

     정형을 파괴하는 아름다움을 창출하였다.

 

    <난죽석도> 종이 수묵 87.0 x 42.3cm 고려대학교박물관       

 

 오른쪽에서 비스듬히 나온 괴석과 괴석 뒤로 뻗어 나온 대나무,

괴석 아래 활달하고 힘찬 난이 자신감 있게 펼쳐져 있다.

화가의 호탕한 성격이 드러난다.

왼편에는 이 세가지를 한 폭에 그린 뜻을 적었다.

   “ 원장元章의 돌, 자유子猷의 대나무, 좌사左史의 난초, 

      이를 모두 그대에게 주는데 그대는 무엇으로 보답하려는가?“

       [ 원장= 북송대의 미불, 자유=동진의 황휘지, 좌사= 초나라의 굴원]

세 가닥 난 잎은 밖을 향해 펼쳐진 반면 엷은 먹으로 그린 한 송이 꽃은

안을 향해 살짝 굽어 균형을 이룬다.

 

3. 묵난의 전성기 19세기

    조선의 사회는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사고는 점차 실용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북학파의 경향으로 흐름을 바꾸어간다.

    그간 천시했던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이를 통한 부를 의.역관,경아전,향리를

    중심으로 축적되고 사회의식의 성장으로 그간 명리 때문에 소극적이었던

    조선 문인들과 청나라 문인학자들과의 교류도 활발해져갔다.

    이는 봉건적 신분제의 붕괴, 상업자본주의의 발전, 소비문화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중세 신분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로의 변화해

    감을 보여주며, 화단에서는 적극적으로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한 중서층의 

    자리매김으로 한때 감상의 대상이었던 서화가 상품으로 거래되고 이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예술가가 등장, 각계 각층의 기존 권문세가와 신흥 자본가들의

    수요에 응하게 됨으로 서화계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인다.

 

 김정희 (金正喜,1786~1850) 정조10년~ 서화가, 호는 阮堂, 秋史, 玄蘭 등

     3~4백개가 넘는 아호, 현란 즐겨 씀. 문신 벼슬은 이조참판까지 이르렀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임금의 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추사의 조부 김이주는 영조임금의 외손자이다. 부친 김노경 역시 높은 벼슬을 함.

     예술분야에서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서예와 난초를

     터득하여 19세기 전반기 예술계를 압도했다.

     제주유배 시 난초를 치는 법을 예서쓰는 법과 같다고 이르면서 화법만을

     따르면서 난을 치지말라고 했다.

     추사의 난초 그림은 간결한 필치로 예서를 쓰듯 빠르고 날카로운 잎새, 짙고

     옅은 농담의 변화가 화폭을 차지하며 공간 감각과 조형능력이 화폭을 압도한다.

 

    <불이선란> 19세기 종이 수묵 56x 31.1cm 개인 소장     

   

    담묵으로 오른편 하단에서부터 담담하게 길고 짧은 몇 개의 선을 그어 올렸다.

    모두 중간에서 꺽이듯 오른쪽으로 굽어 먹이 점점 엷어지면서 바람에 날리듯이

    흐려진다. 같은 먹으로 무심하게 세 번을 꺽어 올린 꽃대는 손가락을 펼친 듯

    살짝 벌렸다. 이른바 ‘절엽난화법’이라 불리는 난법으로 그린 이 그림ㅇ의 난 잎은

    거친 붓으로 담담하게 몇 줄을 그었으나 바람을 맞아 한쪽으로 치우친 난의 초탈한

    경지를 드러내는 듯 하다.

                                         < 추사의 묵란은 본인의 블로그 참조 바람>

 

▹ 조희룡 (趙熙龍,1797~1859)정조13~고종3 자:치운 호: 우봉, 매수

    又峯은 시·서·화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글씨는 추사체

    秋史體를 본받았고,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다.

    난초 역시 김정희의 묵란화墨蘭畫의 정신을 본받아 그렸다.

    추사는 조희룡의 난초 그림이 서법에 의한 문인화 답지않게 아직도

    화법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면하지 못하였다고 낮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우봉의 묵란화 중에는 절제 있고 힘찬 필선으로 된 우수한 작품들이 많다.

    난法을 말함에 있어서 추사는 “대체로 난은 남송의 정소남鄭所南으로부터

    비로소 드러나게 되어, 조이재趙彝齋가 가장 잘 하였었는데, 이것은 인품이

    고고高古하여 특별히 뛰어나지 않으면 쉽게 손댈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조희룡은 추사로부터 예업의 길을 닦아오면서도, 추사와는 문인화에 대한

    관념을 달리하면서 독창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갔다.

    때로는 자신의 난초를 두고 추사로부터 혹평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우봉은

    예술의 길은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으리’라는 불긍거후不肯車後의 정신을

    갖고 있었다. 추사는 그림을 선비의 여기로서 선비적 독서가 우선한다고

    보는 관념적 서권기와 문자향을, 조희룡은 전문적인 수예에 의한 화가적

    자질을 강조했다. 여기서 문인화라는 독립적인 전문적 예술영역이 존재하게

    되었다. 즉 조선 문인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다.

    우봉에게는 난을 치는데 문자향과 서권기로 대표되는 문장과 학문의 기운

    이외에도 더 필요한 것이 있었다.

    "  그림에는 문장과 학문의 기운이 있어야 하고 글씨에는 금석정이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최고의 경지다. 난도 그림으로, 문장과 학문 이외에

       산림이 유정한 운치와 구학과 연하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요체다. 가슴속에 하나의 구학이 있어야 비로소  난을

       이야기 할 수 있다. "

    조희룡은 전탁석錢籜石의 말을 빌어 “난을 그릴 때는 매양 세 번 구부러지는

    데에 묘미가 있다(三轉而妙)”고 하여 이를 난을 그리는 금쪽같은 지침으로

    여겼으나, 우봉의 작품에서 이러한 삼전三轉의 묘妙는 노년에 갈수록 영향력이

    희미해진다.

    노년기에 이를수록 우봉은 추사의 화풍에서 벗어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난을 칠 때 문자기와 고매한 인품을 투영하면서 서예적 법식과 난법의 엄격한

    준용을 강조하였던 김정희와는 달리 조희룡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묵란도〉의

    화제에 “미친 듯이 칠하고 어지럽게 그려(狂塗亂抹) 벽에 가득 걸려있다”고 하여

    자유롭고 거리낌없는 창작태도, 창작자의 개성을 중시하였다.

 

   <묵란> 종이 수묵      22.7x 27.2cm     개인     

   

    이 그림은 질박한 항아리에 하나 가득 난이 담겨있는 모습이다.

    길고 짧은 난 잎은 굵기도하고 가늘기도 한데다 제멋대로 구부려져있고

    사이 사이 반쯤 핀 꽃도 어지럽게 피어있다.

    우봉은 옛날 청동기나 질박한 항아리에 있는 난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였다.

    난은 우봉에게 특별한 풍격의 식물이었다. 그래서 그림으로 그릴 때 좋은 

    그릇에 담긴 모습을 그린다 하였다. 더해서 "난은 기쁜 마음으로 그린다.

    희기사란喜氣寫蘭"는 말을 즐겨썼다.

    부드럽고 빼어난 안 앞이나 맑은 향의 섬세한 꽃은 기쁜 마음으로 그려야

    그 정취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묵란도> 종이 수목 23.2 x 27.5cm   간송미술관   

  

     이 그림은 왼쪽 상단에 난초를 배치하였는데, 난초 잎 중에서 하나는

     오른쪽 상단으로 향하게 하고 다른 한 잎은 길게 빼서 오른쪽 하단까지

     닿게 하는 파격적인 구도미를 보이고 있다. 이 난초 잎을 경계로 하여

     조희룡의 글이 좌우로 적혀 있는데, 난초와 글씨, 인문이 서로 어울려

     시, 글씨, 그림의 일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구도는 추사 金正喜의 난초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추사의 난초 그림보다 배치와 색채, 필치가 대범하고 감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점에서 차별화된다.

     우봉은 추사가 엄격하게 준용하고 있는 난초를 그리는 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난초 잎을 삐치게 그렸으며, 뿌리 부분에서 난 잎이 벌어지게 표현했고

     난 잎을 통통하게 그렸다. 이는 우봉이 추사 묵란화풍을 바탕으로 자신의

     화풍을 시도하는 그의 50대 묵란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아래로 늘어뜨린 긴 잎에서조차 난초 그리는 가장 기본 방식으로

     여겨진 삼전법을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제발에서 스스로 “휘적휘적 함부로 그렸다(狂塗亂抹)”라고 밝히고 있다.

 

     본래 명문가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몰락하여 그의 대에서는 중인

     신분으로 몰락, 벼술이 오위장에 머물렸다.

     추사의 제자로 시문에 능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조희룡이 학계에서 새롭게 부각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는 개인소장 필사본

     <해외란묵>이 알려지면서 부터라고 한다. 임자도 유배지에서 제자들의 힘을

    빌려 여러 서체로 여러본 필사되었는 데 우봉이 유배 갔던 임자도에 9년 뒤,

    진주민란을 모의했다는 죄로, 유배간 김령(金欞,1805~1864)에 의해 육지로 

     나오게 된다. 그,해기옹海寄翁가 해배될 때 갖고 온 두 책 시집<우해악암고>

     과 제화 모음집 <한와헌제화잡존>은 후손에 의해 전해져 현재 경상대학교 

     도서관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   허유(許維 ,1809~1892 허련許鍊)순종29~고종29 호는 소치

    산수, 인물, 묵화에 뛰어 났는데 김정희의 예원에 드나들며 시 서화

    모두 영향을 받고 안목을 길렀다. 「소치실록」

    벼슬이 비충추까지 오른 사대부화가이다.

    김완당의 총애를받았고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낙향하여 운림산방을 세웠다.

    산수화로 「죽수계정도」, 「선면산수도」, 「노송도」 등이 있다.

    십곡병 , 종이 담채 <홍백매, 100.5 x 398cm>는  대작이다.

 

   <석란> 종이 수묵 26.0x 55.6cm 개인   

 

 허련의 말련 작품으로 난법이나 바위를 그리는 법 등에서도 글씨를 쓰는

 획을 변형한 듯한 그의 독특한 필획을 볼수 있다고 한다.

 화면의 중심에는 진한 먹으로 분망하게 형태를 그린 바위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바위를 둘러싸고 방사형으로 난 잎이 펼쳐저 안정되게 하면서도

 활기찬 화면을 연출하고 있다.

 왼편의 작은 바위는 이러한 언정감에 변화를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화제>   托然不辭嚴谷深은

  ‘자취를 의탁함에 암곡의 깊음도 불사한다.

  즉 군자가 도를 행함에 있어서는 어떤 어려운 환뎡도 개의치 않는다는

  뜻으로, 중국 원나라 4대 시인 중 게혜사愒徯斯(1274~1344)의

  [題信上人春蘭]라는 제화시라 한다.

 

  조희룡과 달리 김정희 문하에서 스승의 양식을 충실히 따라 김정희로

  부텨 압록강 이동에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는 칭찬을 받은 화가

 

 신헌 申櫶(1810~1888) 순조10~ 고종25 호는 위당 무관 서화가

     일찍이 1876년(고종 13) 전권대신으로서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한데 이어

     1882년 마국의 슈벨트 제독과 한미우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문장과 서화에 능했느데 글씨는 예서 해서를 잘 썼으며 그림은 묵란을 잘

     그렸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신헌은 추사체를 쓰며 새로운 시대의

     감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의 묵란은 가느다란 앞새의 날카로움과 극단으로 꺽은 두 줄기의 구성은

     스승 추사의 가르침에 따릉 것이며 화폭을 구성하는 공간 감각은 매우

     독자적이었다.

     <묵란도>  종이에 수묵   47.3x41cm     

 

 

 ▹  이하응 李昰應( 1820~1898 순종20~광무2) 석파   흥선 대원군

      정치가 및 서화가 호는 석파 김정희의 문인으로 글씨는 추사체를 자유롭게

      구사하였고 특히 묵란에 능하여 추사로부터 우리나라 제일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의 난초 그림은 권력투쟁의 영광과 시련에서 점철된 삶속에서 그려졌다.

      그의 화풍은 여백을 살리고 대개 많은 수의 앞이 한 무더기를 이루고 굵기의

      변화가 심한 난잎을 가늘고 길며 끝이 예리하다.

      난은 섬세하고 동적이며 칼날처럼 예리하다.

 

<석묵란 대련>  비단에 수묵  123.0 x 32.2cm 국립중앙박물관  

   

 

<12폭 석란도>

   난초그림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흥선대원군이 만 71살 때인 1891년

   유 씨의 부탁을 받고 그린 12폭 <흥선대원군 이하응필 석란도>가

   있습니다. 그림은 2폭씩 대칭구도를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는데, 각 폭에는

   다양한 괴석과 난초가 어우러져 있지요. 난초잎은 뿌리에서 촘촘히 자라나

   위로 한껏 기세를 뿜으며 부드럽게 퍼지게 표현되었는데, 흥선대원군의

   후기 난초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석파의 묵란은 본인의 블로그 참조 바람>

 

 방윤명 方允明 1827~ 1880 순조37~ 고종 17 본관 온양 호는 노천

     무신으로 벼슬은 첨절제사를 지냈다. 글씨는 추사를 본받았다.

     석파가 집권했을 때 그에게 난초를 그려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대신 

    그려주었는데  필치가 대원군과 같아 세인들은 잘 분간하지 못했다고 한다.

    <묵란도>     

 

 

유재소 劉在韶 1829~1911 호는 학석, 형당 화가 무관

    김정희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전기田琦(1825~1854)와는 각별히 교류하였다.

    간결한 구도와 갈필로 원말 사대가 예찬과 황공망의 화풍이 깃드린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시의와 문기를 중시하고 깔끔한 남종화만을

    존중한 조선말기 화단의 주류적인 사조를 이루었던 추사파의 경향을 같이 한다.

    그의 묵란은 전기의 화첩에 들어 있는 그림이다

    무관으로 활약했지만 행적은 불분명하다.

     <묵란도>     

 

 

정학교丁學敎 ( 1832~1914) 순조32~     호는 향수

   초서와 예서에 뛰어난 서예가이자 대나무와 난초 및 괴석으로 명성을 얻은 화가

   정승업의 그림에 적지않은 제발을 남기고 있어 오원의 그림 진부를 가리는데

   일조한다.

   그의 그림은 지나치게 중국적인 취향을 고집하고 있지만 괴석에 있어서는 당대의

   제일로 꼽혔다.

 

<괴석란죽도> 129.1 x29.6cm 

 

윤용구(尹用求,(1853~1939 철종40~ )문관 서화가 호는 석촌

    글씨는 해서, 행서를 잘 썼고 그림은 난초, 대나무와 산수를 잘 그렸다.

    성격이 고아하고 지조가 드높아 그 이름이 널리 퍼졌는데 그의 작품 또한

    그의 명성에 못지않았다.

    화폭을 가득 채우는 구도로 듬성듬성 여백의 미를 담고 있다.

    작대기를 꺽듯 바위를 묘사하여 딱딱한 맛이 흘러나오는데도 농담이

    옅은 먹으로 처리하여 은은하고 부드럽다.

   <석란>은 가볍고 빠를 붓놀림과 옅은 먹이 처리로 복잡함과 단순함으로

   소화해내 시원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김응원(金應元 1855~1921 철종6~ 호는 소호

   난초를 전문으로 그림, 

   그의 난법은 추사와 석파의 필의를 철저하게 뒤따라 구한 말

   서화계에서  난초 그림으로 이름이 높았던 문인화가 였다.

   대원군의 사후에는 묵객으로, 석파 난법의 후계자로 독자적인

   이름을  떨쳤다.

 

  <석란도2곡병> 38.3 x 169cm 길이 209.5cm   

 

 김응원이 60세가 되는 해인 1914년에 제작한 석란화대련이다.

 스무살부터 흥성대원군의 난화를 대필했다.

 그가 44세인 1898년 석파가 타계하자. 석파화법을 직접 계승하여 석란화에서

 일가를 이룬다. 왼쪽 난초가 춘란이고 우른쪽 난초가 일경구화인 혜란이다.

 난잎이 길고 아래로 휘어지도록 그려져 삼전법이 충실하게 표현되어있다.

 

민영익 (閔泳翊, 1860~ 1914) 철종11~ 호는 운미

   묵란과 묵죽에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당시 석파와 나란히 이름을 드날렸다.

   운미의 묵란은 부드럽고 원만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심미감각을 헤아릴 

    있다. 당시 세인들은 석파의 춘란과 운미의 혜란이 쌍벽이라 말했다.

   민영익은 187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 참의가 되며 벼슬살이를

   시작하는데, 일찍부터 그의 집 사랑에는 개화당 인사들이 자주 출입하였다.

   임오군란 때에는 민씨 척족으로 몰려 가옥이 파괴당하였으나, 군란 후에는

   오히려 사죄 사절로 일본에 가서 개화 진행 상황을 살펴보기도 한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통상 사무를 위해 중국 천진天津에 파견되기도 한다.

   민영익은 상해 서화가들과 교유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서화세계를 완성한다.

   그는 닌죽화에 전념하여 청나라 화가들 못지않은 미술세계를 이루었다.

   특히 그의 난초 그림은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너나 할 것 없어

   '운미란芸楣蘭'이라 불렀다. 그의 난초 그림은 난 잎이 살찌고 마른 변화가

   적고, 세 번 꺾어 그린다는 삼전법三轉法도 없이 난 잎이 곧으면서 힘 있게

   곡선을 그린다.

   운미의 화풍은 김정희, 이하응의 '추사란', '석파란'과 함께 근대 한국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노근묵란> 종이 수묵 128 x 58.4cm 삼성미술관  

 

뿌리를 드러낸 두 무리의 난과 함께 여러 무더기의 난이 비스듬한

구도로  그려져있다. 난을 비스듬히 두 무리로 배치한 것은 매우 독특한 구도이다.

이는 네모난 화면에 많은 난을 변화있게 그릴 수 있는 구성이기도하다.

위아래로 하나씩 길게 뺀 잎의 파격은 그 변화를 더욱 효과적으로 보이게 한다.

위쪽 뿌리를 드러낸 난이나 아래쪽의 윗부분만 보이는 난이나 모두 잎은

끝이 뭉툭하고 굵고 가늠이 없이 밋밋하다.    당두나    서미같은 묵란기법을

사용치 않은 것이다.

끝이 모두 잘린 것 같은 난을 그린 것은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느낌으로 다시 해석하여 표현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현실에 대한 좌절감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리고 뿌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도 자신의 망명생활 등 뿌리내릴 곳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있다.

 

 서병호(徐丙五, 1862-1935) 철종13~  본관은 달성  호는 석재 石齋

    1901년을 전후  석재는 1898년과 1909년 두 번이나 상해를 방문해

    민영익이나 상해의 서화가 포화 와 오창석과 직접 교유하여 이시기의

    문인화법에 영향을 받아 사군자를 그렸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민영익의 묵란, 묵죽 화풍을 수용한 작품 활동을

    하며, 많은 제자들에게 민영익의 화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서병오의 제자들인 김진만金鎭萬, 서상하徐相夏, 배효원裵孝源,

    서동균徐東均 등이 운미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22년 서울에서 조선미술전남회가 열리자 박영효, 김규진 등과 더불어 

     서와 사군자 부심사위원직도 여러번 역임한다.

    <묵란도>

 

 김용진( 金容鎭 1878~ 1968 )고종15~ 문인화가 호는 영운, 구룡산인

    대원군의 외손녀 임천 조씨의 3남 참판 김정규의 양자  안동김씨의 문중

    40세가 넘어 그림을 시작했으며 사군자를 주로 했다.

    그의 정석적인 작품의 가치는 독창적이기보다는 아류를 형성하고 있으나 작품에

    인격이 서려 격조가 높았다.

    초기 선전에 출품했으며 국전 심사위원 및 고문을 역임했다.

    일찍이 중국의 유명한 서화가 방명方洺에게 그림 공부를 했으며

    만년에는 특히 중국의 명가 오창석吳昌碩의 그림에 심취하여 화풍이

    오씨와 많이 닮아 있다.

   <묵란도>

 

 

 황용하 (黃庸河) 1899(광무 3~ ) 호는 미산(美山), 등운(騰雲), 자는 윤중(允中)

  개성에서 벽암碧巖 황석일(黃錫一, 1849∼1903)과 설성 김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개성이 낳은 명성 높은 4형제 서화가(宗河·成河·敬河·庸河) 중 둘째로

  지두화指頭畫의 명인이었다.

  어려서 형제들과 함께 10여 년 동안 사숙을 통해 한학과  고전을 배웠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12회까지 특선과 입선을 여러 차례 했으며,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는 추천작가로 선정되었다.

 

  <묵란> 종이에 수묵 128 x 33.5cm/ 쌍 121x33.5cm 47.64 x 13.19inch   

 

조동윤(趙東潤, 1871~1923) 아호는 혜석惠石  풍양조씨

    부친은 조영하, 신정왕후의 조카 1889년 과거에 급제 관직에 입신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 등 무관 벼슬 다수 역임

    한일 병합을 위해 군부를 먼저 장악하려는 일본의 계획에 따라

    일본 육군을 여러 차례 시찰하고 훈장을 받는 등 친일파로 활동했으며,

    친일 단체 '일진회'에도 가입하여 일제 강점기 조선귀족으로 지냄

    1920년 한일합방 직후 조약체결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남작 작위

    받고, 친일에 적극나서 영친왕의 강제 결혼을 추진하였고 고종이 승하 

    일본식으로 치른 장례의 부제관 자리를 맡기도 함.

     

    < 채란 > 종이에 채색  31.1 x 22.2cm  간송미술관   

 

바위틈에서 돋아난 한 포기 혜란은 권세의 자신감을 보여 주듯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침이 없다. 당두가 강조된 난잎을 보면 언뜻 이하응 난법의

자취가 느껴진다. 하지만 윤택한 필치로 쳐 낸 난잎의 넉넉한 모양은 칼칼한 느낌의

석파란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다. 묵란이 아닌 채색란인 탓도 있지만 난잎의 

기름진 필치와 지나치게 많은 자줏빛 꽃의 어울림에서 군자의 고매함과 청아함

보다는 화려하고 고혹적인 여인의 정취가 먼저 떠오른다.

 

 

 

-   이  상   -

 

**

 

참고 서적

사군자, 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 이선옥 2011 도서출판 돌베개

난화묵향 김용귀 2008 한국학술정보(주)

추사난화 이성현 2018 도서출판 들녘

선비의 향기, 그림으로 만나다 백인산 2012 다섯수레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이동주 2006 (주) 시공사· 시공아트

우봉 조회룡, 19세기 묵자의 영수  이선옥 2017  주식회사 돌베개

 

2024. 10. 12.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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