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나/미술 관련

대향 이중섭의 작품 감상

haanbada 2024. 8. 31. 09:52

**

*

<해와 아이들> 종이 연필 대상 그위 유채 색판선화

 

*

**

이중섭( 李仲燮 | Lee Jung-sub, 1916~1956) 호-대향

 

▶. 개요

실상과 허상이 엉켜서 전설이 되고 빛과 어둠이 섞여 신화가 되듯이

화가 이중섭의 생애는 전설이 되고 작품은 신화가 되었다.

예술가로써 전설적인 존재, 신화적인 존재로 된다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기억되는 존재, 이른바 불멸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멸성은 시간의 지배를 벗어남으로 얻어지는 가치이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나름대로 승리를 얻었다고 하는 화가는 너무도 철저히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당시 자신의 예술 속에서 시간이라는 실재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었을까? 그에게 시간이란 무엇이었을까?

한 화가의 예술에 나타난 시간관념을 추적해보는 것은 시간을 초월한

그 예술가의 예술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 존재해 왔던 시간관념 중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를 든다면

‘선적인 시간관념과 순환적인 시간관념’ⁱ이다.

                                           -.ⁱ 생각하는 그림들 오늘 , 이주헌 p97

선적인 시간관념이란 근대 이후 보편화된 진보적인 현재 중심 시간관념으로

시간이란 하나의 일관된 선처럼 한쪽(과거 현재)에서 현재를 관통하여

다른 한쪽, 미래(앞으로 다가올 현재)으로 흐른다.

반면, 순환적인 시간 관념은 기본적으로 환원과 반복을 인정하는 것,

쉽게 옹고지신溫故知新적, 현실도 과거의 중심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 “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라는 글귀가 공자의 논어에

나온다. 배움에 옛 것이나 새 것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는 이유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기도 하다.

선적인 시간관념의 한 피해는 개발만능의 사고방식으로 20세기초 열강인

제국주의 국가들이 해악한 식민지 약탈정책의 정당성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간관념이 전통적인 우리의 시간관념과 부딪히며 새로운

긴장이 나올 무렵 등장한 우리 근대 예술가 한 사람이 화가 이중섭이다.

이중섭 화가의 예술에서 드러난 시간관념은 기본적으로 순환적 시간

관념에 가깝다.

1930년 평북 정주 오산고보에 입학하면서 미술을 제대로 배우게 되었는데

이때 만난 임용련과 배남순 부부에게서 받은 교육이 화가의 작품세계에

있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남편을 통해 화가와 교류하게 된 백남순은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대

양화과 졸업한 당대에 이름난 엘리트 화가였다.

두 은사를 통해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와 계몽주의의 가치관에 도전하는,

시간관념 상으로는 선적인 시간관념에서 이탈하는, 20세기초 표현주의, 야수파,

입체파 등의 서양 미술사조의 흐름을 화가가 자연스럽게 수용하면서, 야수파나

표현주의가  그러하듯 현재보다는 과거, 문명보다는 원시를 향해 역류하는

시간의 흐름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더해서, 일제 강점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막연하게나마 식민지화 이전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지니게 되었고 민족사관학교 교육을 통해 고구려 고분

벽화를 비롯한 찬란했던 과거의 위대한 우리전통미술은 현재가 아닌 과거가

화가의 시간관념에서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유랑민 화가의 예술세계

화가의 그림 속 시간관념은 순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그것이  일부인

회기적인 성향의 것(도원, 부부 등)이 되어 대부분의 작품 속에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이는 일제 강점하 민족차별의 불리함,  6.25전쟁 전후 현실적으로 짊어진

모진 고통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가족과 생이별, 인간적 고통을 

상업적으로 이용당한  믿었던 지인의 배신에 의한 좌절 등은

순박하고 여린 민족화가의 처절한 현실 타개의 모든 노력을 물거품이 되게함에

따른 화가의 격렬한 거부의 몸짓이며  당시 한반도를 관통하는 서구의

선적인 시간관념에 대한 처절한 예술적 저항으로 보여진다.

화가가 그리워하는 과거는 꿈속에서 예술속의 도원에서 되살아난다.

 당대의 수많은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이런 인연을 통해 화가는

다양한 예술인들의 정서와 교분하게 되었고 덕분에 그의 예술의 폭이 넓어져

그의 작품에서 문학의 향기와 해학적 표현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여러 예술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근대미술의 걸작 <소 = 들소>를 비롯하여 '군동화', '은지화'를 보면

화가는 창조적이었고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노력가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의 생애와 예술세계가 미화된 점 없지 않겠다.

화가의 옛것에 대한 탐구욕, 자부심은 그의 작품에 민족의 역사와 정신,

해학미와 서정을 담게 만들었고 , 작품은 감정을 지닌 생명체가 되게 하였다. 

 

 

▶. 화가 이중섭 연보

 

1. 오산고보 이전

 1916년 9월 이중섭이 평남에 태어났을 때 11살 연상인 형은  평양에 유학 중이고

             부친이 얼마 뒤 돌아가셔 엄마와 누나의 품에서 모성애를 한껏 받으며 

             자란다. 다행이 모친은 여장부로 활달한 기질과 유쾌한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준다. 8실 때 평양의 유력한 기업가인 외조부가 있는 외가로 간다.

1930년  3월 지난해에 낙방한 평양고보 대신  평북 오산고보에 입학 미술부 가입

1931년  새학기에 유학파 출신 전위미술가인 임용련, 백남순  부부 화가 부임한다.

1933년 9월 <제4회 전조선학생작품전>에 '원산시가' 등 2점 출품해 모두 입상한다.

2, 유학시절

1936년 4월 도쿄 교외 있던 제국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1937년 4월 제국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문화학원文化学院에 입학한다

1938년 5월 전위미술가 집단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5점 응모 입선한다.

1941년 3월 선배인 이쾌대와 함께 조선미술가협회 창설 , 3월 5월 창립전 개최

1942년 4월 <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 회원전>에 '소와 아이','소묘' 등 5점 출품

1943년 8월 일본 침략전쟁 마지막 광기 징병제 시행으로 귀국한다.

2. 공산치하

1945년 8월  조선이 광복되었으나 원산은 북한의 공산 정권 치하에 놓인다.

1946년 3월 북조선예술동맹 산하 원산미술동맹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봄에 첫 아들을 얻었으나 10월 무렵 디프테리아로 저 세상으로 보내다.

1948년 2월 둘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고 8월 해방3주년 기념 예술축전 연다.

1949년 원산 근처의 송도원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며

           연필 소묘 등을 많이 했다.

3. 한국전쟁 전후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때 해군함정 LST 동방호를 타고 아무런 준비없이 월남

           이 때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피난오게 되다.

1951년 1월 종교단체의 도움으로 소개지 제주항 도착 다시 서귀포까지 3일간

             눈속의 고난행군 끝에 서귀포 동산마을 이장 댁 곁방에 입주한다.

1951년 12월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과 현지의 연속된 궁핍한 생활로

           부산으로 이주했으나 사정상 부인과 아이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입소시킨다.

1952년 설상가상 격으로 장인상을 당하고 또 친자 재산 상속 건이 겹쳐 6월 아내와

           두 아들만 일본으로 갈 수 있어  제3차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당시는 한일간 국교 단절로  동행이 불가능, 결과적으로 가족과 생이별하게 됨.

1953년 7월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대한해운공사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체류 비자로   

           고배항에 입항, 밀입국으로 도쿄에 도착 가족과 마지막인 일주일의 해후를 한다.

1953년 11월~ 이듬해 5월까지 공예가 유강렬의 초청으로 통영의 나전칠기양성소에

            강사로 출강하며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12월 성림다방에서 '황소','부부' 등

             40여점으로 개인전 연다. 이 기간이 화가에겐 참으로 꿈같은 시절이 된다.

1954년 6월 진주를 떠나 입경하고, 7월 경복궁미술관에 열린 <제6회 대한미술협회전>에

           '닭', '달과 까마귀' ,'소' 를 출품했다.

1954년 9월 전투수기  <저격능선>과  <황금충> 등의 표지화를 제작했다.

1955년 1월18일~27일까지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이중섭 작품전>을 개최 ,'아동',

           '길 떠나는 가족','피난민과 첫눈','황소' 등과 은지화, 소묘를 포함하여 45점을

           출품 28여점이 팔렸으나 기대했던 수금이 제대로 되지않아 크게 실망한다. 

1955년 4월 11일~16일까지 대구 미국공보원 화랑에서<이중섭 작품전>을 개최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 마지막 전시회였다.

 

▶. 이중섭 작품의 特徵

 화가의 작품에는 소, 닭, 아이, 게, 물고기, 가족 등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향토적 요소와 동화적이고 자전적인 요소가 주로 담겼다는 것이 소재상의

 특징이고, 그 밖에 수많은 은지화들은 동화적이고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

 향토적인 소재와 정통적인 색체로 작업하면서도 인간 본연의 고유한 감정이나

 자신의 경험 같은 것을 작품에 잘 녹여낸 작가이다.

 

-.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합판에 유채로 그린다든지, 종이에 유채, 혹은 유채와 수채를 섞어 그렸고,

일반적으로 페인트라 불리우는 도료용 에나멜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 화가의 화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線이다.

 이 선은 일반적으로화가와 비교되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의 선과도 

 다르고, 그가 초기에 그리던 루오(G.Rouault)적인 선과도 다르다.

 표면에 두터운 질감을 나타내며, 선의 반복을 통해 면을 만드는 점에 

 있어서는 차라리 반 고흐의 선과 유사한 점이 보인다.

 선을 길게 힘있게 그어줌으로써 선 의 특성을 살리고 있다.

 선을 통해 운동감과 양감을 표현하는 점에 있어서도, 평면으로 처리되는

 반 고흐나 루오의 선과는 차별성을 갖고 있다.

-. 밀도 높고 치밀한 구성력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더러 객관적이고 원근법적 인 구도를 보여주는 

 풍경화도 있지만, 거의 모든 작품들은 사물을 평면화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특히 선만으로 모든 것을 구성하는 은지화의 경우는 더욱 평면적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을 조금 더 들여다 보면 평면화된 인물들 사이로 

 3차원의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

 평면화된 것 같으나 그 안에 공간을 지니고 있는, 화면은 작으나 화면 속의

 공간은 넓게 느껴지는 상반되 는 모순의 논리가 이중섭의 작품에 내재하는

 것은 바로 그의 치밀한 구성력에서 오는 것이다.

-. 인물의 표현에서 화가의 특징이 나타난다.

 과감한 곡선과 요약을 통해 인체의 형태를 자유롭게 나타내고 있어

 정상적인 인물의 형상에서 벗어나고 있음에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얼굴의 형태는 간략하게양식화하고 전형화시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 이용우 고대교수 미술평론가의 '이중섭소고' 참조

 

▶. 작품 감상

 

<황소>  1950대  종이에 유채 26.4x 38.7cm 국립현대미술관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늠름한 황소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몸을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쳐들었을 순간을 포착한 듯

입이살짝 벌어져 있다.

강렬한 붉은 색조로 인해 황소의 거칠고 강인한 생명력이

극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커다란 눈망울과 살짝 벌어진 입은

우리가 늘 보았던 그 모습이다.

선이 굵고 우직해 보이는 황소는 누가 봐도 우리의 친근한 황소다.

살짝 벌린 입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하다. 과묵하고 듬직한

청년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이중섭화가는 자신을 황소라고 여겼다.

1954년 통영에서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 < 흰소 >

 화가에게 조선을 상징하는 동물은 바로 소였다. 그에게 소는 외양간에서

 얌전히 풀을 뜯거나 밭을 가는 소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차라리

 어디에도 굴레를 씌울 수 없는 들소와 같은 자유로운 모습의 존재였다.

 화가가 그린 소는 누구도 제압할 수 없는 강한 존재로 그에게 있어

 소는 존재의 이유이며 삶의 투지요, 남자의 자존심, 민족의 모습이었다.

 그랬기에 ‘흰소’가 일제 무단강점기를 겪고  뒤이어 일어난 전쟁 전후 

 피폐해진 우리 민족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해석이된다.

 그런데 황소와 비교해 조금 말라 보일 뿐 흰소에게도 끈질긴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음이 보인다.

 뒤로 길게 뻗은 뒷다리에서는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힘이 느껴지지만

 붓 터치로 흩날리듯 표현한 꼬리의 움직임에서는 힘찬 에너지가

 느껴진다. 조금 지쳤을지 몰라도 곧 힘차게 도약할 힘을 비축하여

 조금 천천히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흰소>  1953~54년   30.7 x 41.6cm 국립현대미술관

 

1972년 유작 전시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흰소는  삼성가의 기증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이중섭이 유독 "소"를 그린 이유는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를 살던 이중섭이 소를 통해 강한 민족성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흰소는 개인의 경험과 시각에 따라 억압된 힘의 발산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해서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는 열린 의미를 갖고 있다

흰소는 굵고 힘찬 필치로 그려져 황소의 강인함과 활력을 표현하다.

특히 꼬리와 발굽, 머리 부분의 선들은 빠르고 날카로운 움직임을 보여주고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사실적인 묘사 보다는 단순화된 형태를 사용하여

추상적인 표현과도 연결이 된다.

그리고 대비적인 색채들, 흰색과 검은색, 붉은색, 은 시각적인 긴장감과 활력과 

공격성을 나타냄으로 들소의 강렬한 존재감을 강조해 주고 있다.

소의 머리 부분은 이런 바탕 위에 선과 색을 더욱 절묘하게 배합하여 그렸다.

흰 선은 마치 살아 있는 소가 거친숨을 내쉬며 분노하는 듯 생동감을 더해주고,

머리 부분에서 보인 이러한 절정은 목덜미를 지나 꼬리와 생식기를 거치면서

힘이 분산된다.

그리고 흰소가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 배경의 생략은 집중도를 높이는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창출하여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게 한다

 

<흰소 >  1954 30x47cm 홍대미술관

 

 

이 작품은 윤곽을 먼저 선으로 그리고 그 선 안쪽을 색으로 채우는

기법(구륵법)을 썼는데 , 이 기법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법이다.

그림 <소>는 화가의 자화상이자 끈질긴 한국인의 기상을 상징한다.

소가 너무 말라 피골이 상접한 것은 일본의 강점기 뒤를 이어 6.25 전쟁 발발로

당시 먹고살기 힘든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앞다리의 높이와 뒷다리의 각도로 보아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달려가는 모습이라 한다.

 

<가족과 첫눈=피난민과 첫눈> 1950년대 종이유채 32 x 49.5m 국립현대미술관

 

가족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한 이후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추운 겨울날 서귀포까지 눈을 맞으며 가족이

함께 걸어갔던 기억을 담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겨울날 제주도 바닷가에 큰 눈덩이가 쏟아지는 와중에 새와 물고기와

사람들의 몸이 그 세상 아래 꽉 차게 뒤엉켜 난리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사람의 팔과 새 날개가 겹치고 다리와 꼬리가 꼬여져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애 젖먹이고 마시고 함께 노는 되려 살아있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디에도 피난살이의 어려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려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모습이다.

가난한 피난살이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모두 함께 지냈던

것이 너무나 소중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기에 바닷가의 추억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 <서귀포 풍경1, 서귀포 환상>  도원 1951 56 x92cm 합판에 유채 개인(강임용) 

 

하얀 갈매기에 올라탄 아이가 바다위를 날고 있다.

해안선을 따라 과수원에서는 여섯 아이들이 커다란 감귤을 따거나

둘씩 짝을 지어 과일을 날으면서 한창 바쁘다.

과수원의 황토색 흙과 보랏빛을 띤 드넓은 바다의 색채가 따뜻함을

전해주는 작품으로 마사코와 인터뷰에 의하면 당시 사는 집에서

바닷가(자구리)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 집에서 가까운 언덕,

문섬 섶섬이 보이는,에서 화가가 자주 스케치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서귀포 풍경2, 섶섬이 보이는 풍경>1951 41x47 합판에 유채 이중섭미술관 

 

 화가의 제작방법은 데상의 일정한 퇴고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이미지의 양식화이고

그것의 구상적 전개라 할 수 있다.

그려지는 대상은 추상이 아니라 직접 확인된 자연물이다.

넓은 이미에서 화가의 시각의 근원은 자연주의적이나 그럼에도 그의 방법은 사실적 

접근이 아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에 근거하면서도 

주관적인 해석에 의해 걸러진 상태를 지향한다.

이런 화가의 방법적 특성에 기대어 본다면 그의 일련의 풍경화은 현장에서 사생이라는 

객관적인 대상에의 접근을 보여주는 예외적인 작품군이라 할 수 있다.

 화가는 후기 인상파의 다양한 화풍에 주로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지는 데,

그 중 풍경화에 있어서 세잔느의 초기 풍경화와 그 느낌이 유사한 작품이 있다.

화면의 전경에 나타 나는 거친 나뭇가지들의 표현이 특히 그러하다.

 - 1952부터 13년간  서귀포 동산마을과 솔동산에 살며 문섬과 섭섬을 매일 본 경험상 -

50년대 중후반 경 지금의 이중섭로는 동서로 깔린 주도로인 태평로부터 북쪽으로 연결되

동산마을 지나 오일시장으로 가는 좀 비탈진 돌많은 도로였다. 이 도로 윗쪽 극장 너머

중정로 주변  오일시장이 열리는 지역은 눈에 띄는 마을이 없고  매우 넓은 산간 밭 지역이었다.

그림에서 보이는 섭섬 앞쪽으로 Y자 형으로 좀 뛰어나온 곳이 소남머리(해안 언덕)다.

밑은 깍아지른 듯한 바위절벽으로 약 30m 아래 시퍼런 바닷물이 출렁인다.

아이들과 함께 다슬기, 게, 소라 잡던 곳은 자구리 해안가로 소남머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20분 거리인데 경사가 심해 서귀국민학교 쪽으로 돌아 내려간다. 현무암 암석과 돌맹이가

깔린 넓은 해안가 이다 , 아마  이 그림 스케치는 현 제석공원쪽 언덕에서 했던 것 같다.

 

<서귀포 바닷가의 아이들> 1952 색판선화 ,종이에 연필과 수채 32.5X49.8cm 개인 

 

색판을 만든 뒤 긁어내기나 덧칠·덧새기는 기법을 사용해서 그린

색판선화로 부산시절 가족과 이별한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본다.

낚싯배를 탄 7명이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다. 낚싯대 같은 도구를

쓰는 아이는 단 한명, 나머지 여섯은 온몸으로 물고기를 잡고 있다.

그런데 얼굴 표정이나 몸동작을 보면 이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는 모습이

아니다. 물고기도 잡힌다는 두려움이나 위기의식을 갖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들과 뒤엉켜 한 몸이 된다.

왼쪽 화면의 네 마리 물고기는 어미와 새끼로 두 쌍인데 둘 다 아이들이

손을 뻗어 쓰다듬거나 받쳐주고 있다. 그러니 물고기 사냥이 아니라

물고기와 유희를 하고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낚싯줄에 매달린 물고기가

네 마리 있지만 그것도 한 마리는 한 아이가 떠받치고 있다.

그리고 매달린 새끼고기 곁에 어미 물고기가 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물고기와 아이들이 혼연일치의 하나가 되는 자연의 신비로운 교감이다.

 

< 부부 >  1953년경  종이에 유채 51.5x35.5cm  호암미술관 

 

두 마리 닭이 서로를 갈구하는 모습

마사코와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도 하고 남북분단의

비애를 그린 것이라고도 함

한 쌍의 남녀가 있어야할 자리에 상상적인 새가 대신해서 열정적인

포옹과 입맞춤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

붉은 볏을 가진 닭이 몸을 비틀고 노란색 부리를 아래로 크게 벌리고

있다. 그 아래로 날개를 한껏 펼친 암컷이 수컷의 혀를 받아드린다.

화가는 새의 몸통을 두 개의 가느다란 선으로 바꿨다.

다리를 그 몸신과 연결시켜 몸통 보다는 훨씬 길게 뽑아냈다.

날개는 마치 아주 우아한 학날개를 향해 놓은 것처럼 활짝 펼쳤다.  

그런데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새는 그런 날개가 없고 다만 힘컷 세운

붉고 아름다운 벼슬만 반짝인다. 

 

숫컷이 날카로운 부리와 거친 볏은 이중섭을 우아한 날개 모양을 한

암컷은 마사코를 연상시킨다고도 한다.

천년의 아름다음을 지켜온 고구려 시대 우현리 강서중묘 고분벽화

<주작도>를 연상시킨다.

부부의 소재가 된 한 쌍의 새는 봉황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것이다.

봉황은 상서로움과 경사스로움을 표상한다.

우리전통미술의 미의식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화가가

전해오는 봉과 황의 천생연분 사랑을 빌려서 표현한 것이다.

 

<춤추는 가족>1953~1954 종이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손을 맞잡은 가족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벌거벗어 황갈색으로

그을린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이들은 신나서 고개를 젖히고 웃

고있다. 계속 바라보면 네 명이었던 가족은 어느새 빙빙 도는 하나의

원, 한 덩어리로 보인다.

가족 구성원이 하나인 것처럼 함께하고 있는 모습은 그들 간의

유대감이 돈득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이임을 알려준다.

춤추는 가족의 표정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진정 행복해 보인다.

부부는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고 뒤돌아 돌고있기에 뒤통수가

보여야할 아이들은 애써 감상자들에게 목을 돌려 자신들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지 보여주고 있다.

이그림은 앙리 마티스의 ‘the Dance’(1909~1910)와 함께 소개되곤 한다.

화가는 원형은 만물의 근원이고 창조의 영감이 된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춤추는 가족>은 구성에 있어서나 인물의 표현에 있어 마티스의 <춤>을

연상시켜 주는 작품 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작품은 정돈되어 춤을 추고 있는

운동감이 덜 느껴지는데 반해, 이중섭 의 인물들은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고 있는 운동감이 잘 느껴지고 있다.

특히 배경에 밝은 노란색과 파란색을 번갈아 칠하고 인물들의 발치에는

초록색을 칠해 땅을 나타내고 있는데, 번 갈아 칠해진 노란색과 파란색이

인물의 움직임을 강조하고 있다.

  

<길떠나는 가족> 1954 종이에 유체 29.5  x 64.5 cm 개인소장 

 

이 그림은 인물등의 눈, 코, 입을 그리지않았다. 개인전에 공개할 유채화에서는 

환희 뿐만 아니라 슬픔을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길 떠나는 가족’은 사실적 재현보다 감정에 무게를 둔 표현주의적 경향이 짙다.

형태는 불분명하지만 안정된 수평적 구도, 인물과 소의 경쾌한 움직임, 리듬감과

자신감 넘치는 터치 등 이중섭의 화풍이 여실히 드러난다.

앞에서 이끄는 아빠의 손동작에서 구름, 아이와 엄마의 흥겨운 모습, 하얀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아이의 손동작까지 시선을 유도하는 회화적 장치가 돋보인다.

실바람이 불어 구름은 흩어지고 떠나는 길목마다 소망의 꽃잎이 흩날리는 느낌을 준다.

가족을 태우고 덜컹 덜컹거리며가는 소달구지에는 절망 대신 웃음과 희망을 가득

실고자 한 이중섭의 마음이 담겨있다.

 

<길 떠나는 가족 >1954  편지지에 유채 10.5 x 25.7cm 이중섭미술관

 

이중섭은 부산에서 지내는 동안 가족들을 일본에서 데려오기 위해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이 이토록 오랫동안 관심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림에 담긴

가족을 향한 끝없는 사랑과 그리움이 주는 절실함이다.

‘길 떠나는 가족’은 아내와 두 아들이 1952년 7월에 일본으로 떠난 지

2년 정도 흐른 시점에서 그린 것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쌓여있던 때에 그린 그림이다.

원산에서부터 시작된 2년6개월의 피난세월은 가족이 함께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결국에 일본으로 가족을 떠나보낸 후 그리움이 사무치도록 밀려올 때마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이겨냈다.

개인전을 앞두고 작품제작에 몰두하면서도 순간순간 아내의 품과

천진난만한 두 아들의 얼굴이 아른거릴 때마다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가족과 해후하는 꿈을 키워나갔다.

흥겨움, 행복 그리고 슬픔이 동시에 담긴 ‘길 떠나는 가족’은

당시 가족을 향한 이중섭의 심리적 상황이 드러난다.

 

 

< 가족을 그리는 화가 > 1954 편지화 26.3 X 20.3cm 종이에 잉크 색연필   개인

  

 

 1955년 1.18.~27일까지 10일간 열릴 서울미도파백화점 4층 화랑 개인전과 24일

 대구 전시를 앞두고, 서로 얼싸 않고 하나가 된 가족의 모습을 그리는

 자신을 묘사하고 , 편지와 항시 아이들을 생각하는 아빠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으로 편지내용은 일부 발췌하면

    생략

    아빠는 매일 열심히 건강하게 그림을 그려요.

    조금만 있으면 아빠가 도쿄에 갈께요.

    건강하게 아빠를 기다려 주세요.

 

     아빠  ㅈ ㅜ ㅇ ㅅ ㅓ ㅂ  

 *

 

 <달과 까마귀> 1954  종이에 유채  29 x 41.5cm     호암미술관 

 

<달과 까마귀>는 이중섭의 대표작으로 곱히기도 하는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달이 빛나고, 중앙에 세 줄의 전깃줄이 화면을 가로지르고,

그 위에 앉아 있거나 날아드는 까마귀들을 그린 작품이다.

노랑과 파랑의 대비는 <춤추는 가족>에서도 보았듯이 상당히 눈에 두드러지는 배색이다.

그 위에 까마귀를 그려서 색의 대비 효과가 더 확실히 살아나고 있다.

전체 화면인 청색 바탕에 노란색 달을 칠한 후, 그 위에 횐색, 회색을 덧칠하고 있으며,

부분부분 노란색이 덧칠되어 있어 마치 달빛이 비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배경되는 청녹색빛은 현해탄을 상징하는 것 같고 좌측으로 날아가는 까마귀는 화가를

좌측에 모여있는 까마귀들은 마사코와 두아들, 그리고 좌측 상단 화면 밖 하늘에서

무리를 향해 날아드는 한 마리의 까마귀는 일찍 1945년에 먼저 보낸 아들을 그린 것

같다고도 한다.

달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력의 상징이다. 푸른 물빛과도 같은 달빛은 시각적 차가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달빛에서 푸근함을 느낀다. 달빛은 어두움의 일부를 몰아내지만 어둠과

공존함으로 구별이 아닌 융합으로 원만구족을 나타낸다.

사실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1952년 2월 장인이 사망했고, 6월 가족과 생이별

한지 1년즈음 지난 시점이었다.  그간 일본 부인이 가족사업으로 시작했던 책 무역사업이  

업친데 겹친격으로 화가의 후배에게 사기까지 당해서 재산상에 큰 화를 입고 부채까지

짊어지게 된다. 그래서 더욱  화가는 더욱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한 마지막 희망인 서울미도파화랑에 전시할  

그림을 그리는 데 온갖 정성과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둥근 해 속에 삼족오가 있다는 내용은 평양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 있다.

삼족오는 태양의 힘을 머금은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까마귀를 

흉조로 보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한다. 그 이전에는 까마귀는 예언의 능력이 

있고 영험한 지혜로운 동물로 자리잡고 있었다.

삼족오는 우리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유구한 역사를 상징하기도 했고 동이족의 

표식이기도 했다고 한다.

보름달과 까마귀하면  정월대보름의 명절 음식이 생각난다.  재사가 끝나면  

차려논 음식 가지가지 전부 띁어내어 까마귀몫으로 대문밖에 놓아둔다.

다시말하면 가족들이 만사를  재쳐놓고 멀리 가까이서 찾아와 만남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고구려의 국조 삼족오  민족의 신에게 비는 화가의 진정어린 맘이 드러난다.

세가닥의 전선은  자신과, 일본에 있는 부인, 원산에 계신 어머니를 연결하는

염원의 선이기도 하고 또한, 삼족오라는 세 발 달린 까마귀를 연상시킨다.

 

<돌아오지 않는 강> 1956 종이에 연필과 유채 18.6x14.5cm  임옥미술관 , 개인

작품5 18.5x14.5 종이에 유채 개인소유
작품 1과 2 18.8x 14.6 종이에 유채 임옥미술관

 

 눈이 온통 내리는 날  한 남자가 집창가에  앉아 집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어느 날 집 밖 골목길에서 보았을 하나의 장면을 여러 가지로 변주한 이 그림들은

 총 5 작품으로 모두 집안에서 창문에 팔을 기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성인

 혹은  어린남자가,  기다리다 지쳐, 표정도 없이  체념의 감정을 보이는 듯하고

 집 밖에는 머리에 광주리를 인 한 여자가 걸어오는 모습이 기본 설정이다

 창 안쪽의 인물은 창틀에 기댄 팔에 고개를 뉘기도 하고 똑바로 들고 있기도 한데,

 노란 티를 둥굴게 감싼 한 그림에서는 한 아이가 쳐다보는 쪽 화면 아래 담 위에는

 흰 새  한 마리가 앉아 창쪽을 보며 울고있다(작품 5). 이 그림은 전쟁으로 헤어진

 원산 고향의 꿈에도 그리운 모친으로도 보인다. 저고리, 눈, 흰새 모두  꿈만 같다.

 한편 머리에 물건을 인 여인을 , 정릉에서 함께 생활했던 시인 조명암의 증언따라,

 처절하게 재회를 원하던 만나기가 어려운 아내(임옥미술관 소장)라고 본다면 

 같은  설정이지만 또 다른 슬픔으로 다가 온다.

 이 작품들에선 흰 새는 없고 강아지가 등장하지만 대신 검은 눈이 얼룩처럼  굵게

 떨어지고 창문 안쪽은 먹물 처럼 검더. <도원>에서 보였던 다채로운 색은 사라지고

 무채색만 보인다.  다른 작품에서 보이던 힘찬 필치에서 느껴지는 박력도 즐겁고

 명랑한 분위기도 보이지 않는다.

 전쟁과 피난살이, 지독하게 이어진 가난,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버텨 내던 이중섭은 1955년 어렵살이 개인전도 열고

 작품도 팔렸지만 , 손에 집히는 것은 없었고 생각했던 데로 일이 풀리지 않자

 크게 절망했다. 절박했던 만큼 좌절도 그만큼 컸던것 같다.

 화가는 이 그림을 벽에 걸어두고 그 아래 아내의 편지를 띁지도 않은채

 붙여놓았다고 한다. 아내의 편지를 학수고대하던 이전의 모습은 이미 없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모조리 잃었기 때문이다.

 

 1956년 7월 성가정신병원에 입원 1달 여 치료를 받았고,  수도육군병원 정신과에

 입원 치료 받고, 다시 성 베드로 병원, 청량리 뇌병원으로, 마지막으로 적십자병원

 311호 실에서 1956년 9월6일 간염으로 인해 복수가 차 올라 41살로 요절한다.

 시신은 무연고로 3일간 병원에 방치, 병원 침대 위에는 밀린 치료비 계산서가

 붙어있었다. 나중 가족도 없이 지인들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 은지화

은지화는 담뱃갑을 감쌓던 은지에 그린 일종의그라타주 기법형식의 그림이다.

전쟁 전후 물자난과 화가가 접한 생계조차 힘든 가난은 그림 재료를 쉽게

확보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그의 많은 그림이 작은 종이에 그려진 것이다.

어져튼 휴대하기 쉬운 담뱃갑의 은지에 그려진 소묘내지는 작품으로 봐야한다.

하지만 은지화는 무엇보다 유려하면서도 일필휘지의 역동감 있는 선묘가

특징을 이룬다. 못 같은 뾰족한 도구로 음각하여 물감을 집어넣은 그림이다.

 마치 청자의 상감기법을 응용한 것 같다.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에 이중섭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다.

 은지화는 금속공예의 은입사, 고려청자의 상감법을 연상케하는 화가의 열정과

 창의성을 상징한다.

 은지화는 재료의 확대라는 측면 외에도 기법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은지는 표면에 알루미늄막이 얇게 입혀져서 종이의 특성과 금속의 특성이

 함께 나타난다. 이러한 특성을 충분히 활용한 것이 이중섭의 은지화이다.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듯 가는 철필로 은지 위에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표면에 안료를 발라 가는 홈으로 파인 선에 들어가게 한 후, 표면의 안료를

 살짝 닦아내어, 나타내고자 하는 부분을 음각으로 나타내는 기법이다.

 이때 알루미늄의 특성으로 인해 안료가 종이에 스며들지 않아 판화의 효과가

 나타난다.

 작품의 소재상의 특징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세계로 집약되 있으며

 물고기, 비둘기, 새, 나비, 게 , 복숭아, 끈 등과 어울려 벌거벗은 채로

 엉켜 놀고있는 천진무구한 동심의 아이들. 그들은 어떤 격식도 없는 자유

 인간과 동물의 주종관계가 와해된 만물이 평등한 그 자체의 자세를 보이고 

 은화지 속 아이들의 세계는 화가 대향이 희망했던 그의 삶과 예술이 웅축된 

 낭만적인 이상세계인  몽유도원(낙원)이었다.

 특히 이중섭 그림의 소재들은 원형 구도를 이루면서 원형이정의 정신이

 담겨있기도 하다.

 이는 화가의 삶의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는 그의 예술세계인 생태학적

 세계관인 낭만적인 이상세계를 품을 수 있는 해학정신이 있어 가능했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현재 약 300여 점 남겨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화가의 부인 마사코의 증언에 의하면 1952년 자신이 일본으로 되돌아 가기

 전인 제주, 부산은 물론 함께했던 도쿄시절에도 은지화를 본적이 없다했다.

 1953년 7월 하순쯤, 시인 구상이 구해준 선원증으로 도항  일주일간 도쿄에

 방문했을 때 일화로, 그때 이중섭은 아내에게 은지화 뭉치(70여점)를 건넸다고 

 한다. 일화로 은지화에 물아일체의 몰입을 위해 등장된, 현실의 모든 규제와

 제약에서 자유로운, 소재로써의 어른, 아이들 인간 나상이 공개된 전시회에서

 춘화로 인식되어 당국에  의해 일부 압수당하는 사건도 있었음을 첨언한다.

 

< 낙원의 가족(도원) >1954 가을 은지에 새김 유채 8.3 x 15.4cm 뉴욕현대미술관

 

낙원을 상상하는 일은 시공을 초월한 전 인류의 유희거리였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 속에 전해오는 낙원에 대한 이야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보면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이라는

이상세계를 꿈꾸는 일은 인간이 현생을 이어갈 수 있는 일종의 동력일 수도 있겠다.

이중섭은 복숭아 가득한 도원을 자주 그렸다. 아마도 너무 가혹한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무릉도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위의 [낙원의 가족]을 보면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나비가 노니는 공간에 

아이들도 행복하게 뛰어놀고 있다.

오른 편의 남자는 크고 탐스러운 복숭아를 누워있는 여인에게 전한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는 가족과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일 가족이 함께 만나 행복하게 지낼 날을 꿈꿨다.

복숭아가 있는 도원은 그에게 머지않아 올 밝은 꿈이자 소망이었다.

 

 < 도원 >  1953  종이유채   65x76cm   개인

 

낙원인 도원은 언제나 복숭아 꽃과 열매가 피고 탐스럽게 열여있는 곳이다.

네 아이가 나무에 매달려 천진난만하게 복숭아를 따먹고 있다.

노란색, 푸른색, 녹색과 붉은 색 등 밝은 생채가 주조를 이루고 

꾸불꾸불한 선에서는 율동감이 느껴진다.

같은 발상임에도 <도원>은 <서귀포의 환상>에 비해 훨씬 양식화 되어

있다.   <서귀포의 환상>이 사실에 가까운 묘사 태도를 보인 반면 이 작품은

화가 특유의 구성적 패턴에 걸러진 짜임새와 표현을 유지해 주고 있다.

물론 두 작품 모두 파노라마적인 특징도 보인다. 여기에서도 장면이 좌우로

평풍처럼 전개되는 특징과 아울러 시선의 흐름이 하단에 상단으로 전개되면서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 내고 있어 벽화에 상용하는 구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벌거숭이 아이들 일부는 나무에 올라가 복숭아를따 고 일부는 땅 위에서 

떨어질 과일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강렬한 자연에의 감흥이 없다면 이 같은 원초적인 환상은 태어나지 못한다.

벌거숭이 아이들이 펼쳐보이는 낙원의 꿈은 자연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화가의 의도가 보인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무릉도원의 모습이다.

도원을 그리고 3년뒤 <돌아오지않는 강>을 그린다.

 

- 끝으로 꼭 전하고 싶은 일화를 적고 싶다.

   이화백의 가족을 일본에 보낸 후 범천동 낭인설이 돌던 때의 이야기다.

   1951년 12월 화가 가족은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이주해 온다. 그러나

   원산시절 지인들이 있어 찾아 보았지만 주거할만한 집을 얻지못해 할 수없이

   부인과 두아들을 일본인 피난민수용소에 머물게 했다.

   본인은 오산보고 동창의 판잣집 방한칸 얻고  낮에는 미군부대 부두노동했다.

   일은 부두에서 오일 드럼을 굴러서 화차에 싣는 작업, 낡은 선박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콜타르를 칠하는 중노동이었다.

   하루는 일 끝내고 나오다 한 소년이 헌병에게 집단구타 당하는 관경을 보았다.

   소년이 판자집에 쓸 널판을 흠쳤다는 것이다.  일반인은 엄두도 못낼 일을 한다.

   배고프고 지친 몸으로 달려간 화가의 복싱실력은 그 헌병들을 제압하였으나

   뒤이어 달려온 부두순환 백차에 탄 헌병들의 치도곤을 맞고 짓밟혀 정신잃은

   화가 머리에서 피가 너무 많이 나서 겁낸 헌병들이 부두밖의 병원에 실어다놓고

   모두 도망가버렸다.  이 사건의 상처가 화가의 건강에 큰 휴우증을 남긴다.

   돈이 없으니 적절한 약물치료도 못하고   부적절한 사고 후 몸관리로  건강이

   나빠지고  외로음으로 우울증이 심해졌고 거듭된  걸식으로 거식증까지 겪는다.

  1955년 초겨울 무렵에는 정릉골짜기 옮겨와 한동안  언덕길을 산책도 하고

  스케치도 곳잘 하며 병색이 가시는 듯 했으나 술로 인해 황달 기운도 나타났다.

   말하기 좋다고 정신적 좌절, 절망이 죽음의 원인이라지만 화가 41살 중견의

   나이에 절명은  정신력만으로는 육체의 무너짐을 막을 수가 없음 보여준다. -

   

 

-  이 상  -

 

**

 참고서적 :

 이중섭, 백년의 신화 2016   국립현대미술관  강승완 총괄  디지털 출력 (주)트리콤

 이중섭, 편지화         2023   최열     혜화1117

 이중섭을 훔치다       2011   김영진  마디다스북스

 이중섭                    2012   오광수  (주)시공사

 생각하는 그림들 오늘 2004  이주헌  예담출판사

 커튼콜, 한국의 현대미술가 30인의 삶과 작품  정하윤  (주)은행나무

 이중섭 평전             2014    최열    돌베개

 

**

  2024. 8. 31.      한바다  

'삶과 나 > 미술 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영국의 작품 감상  (0) 2024.07.29
장욱진의 작품 감상  (1) 2024.07.17
부부의 성정性情  (2) 2024.06.06
해학 (한국인의 미의식)  (0) 2024.04.26
조선의 5대 궁궐  (1) 2024.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