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나/미술 관련

긍재 김득신의 작품 감상하기

haanbada 2023. 6. 4.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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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영조 30년(1754년)에 태어나 순조 22(1822)년까지 살다간 화원 김득신金得臣은

본관이 개성開城이고,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초호는 홍월헌弘月軒이다.

대대로 화원(畵員)을 하여 유명한 개성 김씨 가문은 곡산 노씨(谷山盧氏),

신평 한씨(新平韓氏) 등의 여러 화원 가문과 혼인을 맺으며

그들 가문 사이의 네트워크를 확장시켜 갔다고 본다.

아버지 김응리(金應履)는 화원은 아니었지만, 신평 한씨 가문의 화원 한중흥(韓重興)의

딸과 혼인하였다.

외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복헌復軒 김응원(金應煥)가 당대의 유명 화원이었던 점은

김득신, 김석신, 김양신 삼형제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화원으로 첨중(僉中)을 지낸 한중흥(韓重興)의 외손자이며, 김홍도의 선배로 알려진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 진경산수 의 대가)이 그의 삼촌이고 조카이며,

석신(碩臣)과 양신(良臣)은 친동생이고, 아들인 건종과 수종 하종 모두 화원이었고

그 또한 화원으로 초도첨사(椒島僉使)까지 지냈다.

 

2. 시대상황

 

김득신이 20세가 되기 전에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집안에서 일찍부터

그림 교육을 받았던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김득신에 대한 기록은 1772년(영조 48)에 편찬된 『육상궁시호도감의궤(毓祥宮諡號都監儀軌)

와 조선 철종 때 유재건(劉在建)이 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언급됐고,

1784년(정조 8)에는 『홍문관지(弘文館志)』와 『규장각지(奎章閣志)』가 편찬되었는데,

그때 참여한 명단을 보면, 서명응(徐命應), 채제공(蔡濟恭)과 같은 학자들을 비롯하여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의 규장각 검서관(檢書官)들과 화원도

김득신을 비롯하여 김응환, 이인문, 신한평 등 10인이 이름을 올려져있다고 한다.

1790년(정조 14)에는 사도세자의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의 불정(佛幀, 불상을 그려서

벽에 거는 그림)을 제작하는 데에도 김홍도, 이명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듬해에는 정조의 어진(御眞)을 그리기도 했다. 어진 제작에는 당대 최고 화원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시 주관 화사(主管畫師)는 이명기, 동참 화사(同參畫師)는 김홍도였고,

긍재는 신한평, 허감(許礛), 한종일(韓宗一), 이종현(李宗賢), 변광복(卞光復), 정동관(鄭東觀)과

함께 수종 화사(隨從畫師)로 참여하였다.

현륭원 참배 후 수원 화성에서 배푼 회갑연과 행차를 화원 7명이 1795년부터 3년 걸려 완성한

최초의 왕실행사가 묘사된 궁중화, 군사훈련 그림인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와 같은 기록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栗谷이이의 은거지였던 황해도 고산의 9경치를 궁중화가 문인화가 등이 그린 국보 237호

12폭 수목 담채화인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과 같은 작품은 1803년(순조 3)에

현부행(玄溥行)이라는 사람의 제안으로 김득신, 김홍도, 이인문 등 10명의 화원이 한 폭씩

그린 것이다.

그 외에도 1917년에 오세창(吳世昌)이 편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도 나온다.

 

당시는 조선시대의 르네상스에 해당되는 시기로, 직업 화가군은 이원적 구조로

화단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는 여기화가군(餘技畵家群)과 도화서(圖畵署 , 초기는

도화원(圖畵院)의 화원을 중심으로 한 이루어 졌다.

조선 후기에 기술직 중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추세였고, 국가적으로도

그림 그리는 일이 늘어나면서 화업畫業에 대한 인식이 점차 변화하였다.

특히, 정조대에 이르면 규장각에서 도화서 화원 30명 중 10명을 공개시험으로

선발하여 왕실의 주요 회화 관련 업무를 맡아보도록 하였는데 이를 차비대령화원

(差備待令畵員)’이라했다.

조선 22대 정조(1752~ 180년)는 1775년부터 연로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수행하였으며, 임기 중 탕평책, 대전통편, 신해통공 등을 실시, 많은

인재를 양성 배치했고, 조선의 상업을 한충 더 발전시켜 사회가 안정되었다.

조선예술의 황금기를 열었지만 1800년 창경궁 영춘헌에서 49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승하하게 되어 긍재 김득신은 유명세를 탈 기회를 놓치게 된다.

왜냐면 유명했던 단원에 버금가게 정조는 긍제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신임했다.

 

 

 

 

3. 작품세계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풍속화첩>과 1815년 62세 때 그린 호암미술관

소장의 8폭 풍속 병풍이 알려져 있다.

각 분야에 걸쳐 김홍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풍속화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김홍도의 후기 화풍을 계승하면서 산수를 배경으로 더 삽입시켰고,

또 해학적 분위기와 정서를 좀 더 가미하여 그에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의 작품을 편년으로 따져보면, 대부분의 연구가 ‘홍월헌’이란 호를 쓴 그림은

작품 세계 전반기에, ‘긍재’란 호를 쓴 것은 후반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풍속화첩> 종이담채, 22.4 x 27cm 화첩형태 발문  1935년  이세창

제1폭  야묘도추도(野猫盜雛圖) : 병아리 문 도둑 고양이, 놀라 뛰쳐나오는 노인 모습

제2폭 밀희투전도(密戲鬪牋圖) : 네 명의 남자가 몰래 노름판을 벌이는 모습

제3폭성하직리도(盛夏織履圖) : 한여름 사립문 밖에 자리를 펴고 짚신을 삼는 모습

제4폭 목동오수도(牧童午睡圖) : 목동이 수양버들 아래 불룩한 배를 드러내고 낮잠자는 모습

​제5폭 주중가효도(舟中佳肴圖) : 어부가 배 위에서 즉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모습

제6폭 송하기승도(松下棋僧圖) : 여름철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장기를 두는 승려들 모습

제7폭 강상회음도(江上會飮圖) : 강변에서 어부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

제8폭 야장단련도(冶匠鍛鍊圖  : 대장간의 인부들이 무쇠 단련하는 모습.

 

이 화첩은 김득신의 풍속화를 대표할만한 작품으로 8점 모두 고르게 높은 회화적 수준을 

가지고 있다.

상황과 역활에 맞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시선과 감정을 세심하게 표현하였다.

과감하게 배경을 단순화시키고 주인공에 초점을 맏춰 화면 상으로 돋보이게 했으며,

선택적으로 가해진 명암, 소재에 맞게 조화된 다양한 필치 등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와

구별되는 김득신 고유의 개성을 돋보이게하는 요소이다.

 

그러면 풍속화접 중 긍재의 화풍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야묘도추와 야장단련부터

살펴 보자.

 

 * 야묘도추野猫盜雛(破寂圖)

 

어느 화창한 봄날. 따사로운 봄 햇살 속에서 어미 닭이 갓 태어난 병아리를 거느리고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며 마당 한 귀퉁이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발소리를 죽이며 서서히

다가서는 도둑 고양이. 병아리 한 마리를 잽싸게 가로채 도망치고 어미 닭은 내새끼 병아리를 구해 보겠다고 

고양이를 쫓아 가는데, 뒤 늦게 이 장면을 눈치챈 주인 영감님 화들짝 놀라 병아리를 구출하여고 나선 남편은

버선발로 툇마루를 박차 오르며 긴 담뱃대를 힘껏 휘두르고 있고 부인은 양손을 벌리고 

남편 뒤에서 버선도 신지 않은 맨발로 툇마루를 박차고 뛰어내립니다.  

그 바람에 너무 급했던지, 탕건이 훌러덩 벗겨진 채 몸이 기우뚱 나동그라지며,

짜던 돗자리 틀(고드레)이 훌렁  마당으로 넘어져 있다.  한 순간에 일어난 사건의 시공을 포착한 절묘한 구상이다.

현대인은 중에는 잘 모르는 분들도 많겠지만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계란 10개를 벼짚으로 싸서 한 꾸러미

만들어 선물용으로 썼다. 그리고 집에는 씨 암닭 2~3마리는 마당쇠라고 길렀다.

1700~1800대 당시에는  서민들에게는 병아리 1마리를 보는 눈이 우리와 사뭇 달랐겠다.

김득신의 섬세하고 따뜻한 품성과 평범한 일상을 남다른 관찰력으로 날카롭게 그려 예술로 승화시킨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파적도' 표제 그대로 '정적을 깨는' 순간 포착입니다.

 

* 야장단련冶匠鍛鍊 (대장간)

긍재&nbsp; &nbsp;김득신

 

단원 김홍도

상하 그림 모두  대장간에서 풀무불에 달근 붉은 쇠덩어리를 모루 위에 집게로 잡고 있는 가운데 

나이든 매질꾼이 내려쳤고 옆에 있는 젊은 매질꾼은 박자에 맞추어 쇠방망이를 들어 올리고 있다.

어린 풀무 담당 조수가 풀무 옆에 내려져 매어진 나무가지에 몸을 기대여 내려다 보고 있다.

이제 두 그림의 차이점을 찾아 보자.

우선 단원의 그림 특징은 대각선 구도를 중심으로 생략법을 과감이 도입  암시적 회화공간

으로서 여백을 활용하여 농축된 느낌을 갖도록 한다.

즉 배경을 생략함으로 그림의 주제가 되는 부분을  확 들어나게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낫을 가는 소년 옆 바닥에 놓여있는 물병 주둥이가 깨져 있고, 풀무 옆에

설치된 쉼틀 막대기는 거꾸로 위로 가고 바람이 들어 가는 풀무 아궁이 입구는 뭔가로 막혀있다.

일부러 이렇게 그렸을까? 웃음을 자아내기위해,

한편 김득신의 대장간은 생략된 지붕이나 기둥같은 배경이 추가됬고  쇠덩어리 매질과는

상관이 없는 낫을 가는 젊은이를 뺐고, 널려있던 공구들이나 숫돌 옆 물통도 뺐다.

다시 말하면 인물의 화면 배치나 움직이는 자세 등은 매우 유사하나, 한 분은 배경을 생략했고

다른 분은 배경을 넣고 주제가 되는 부분의 자세한 부분을 생략했다.

또 다른 하나,  붉은 쇠덩어리를 집게로 잡고 있는 분이 단원의 그림 속에서는 매질하는 곳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 긍재의 그림 속에서는 더 젊고, 관객인  우리를 보고 살짝 미소짓고 있다.

 

* 추수타작秋收打作

긍재의 풍속도첩 보물 제1987호 중 한 첩

* 사계풍속도병四季風俗圖屛

긍재 풍속八曲屛 중 1폭 1815&nbsp; 삼성미술관

    

    긍재의 '벼타작' 팔곡병풍을 볼 때면 약 10년전 쯤 국립박물관에서

    한정판으로 발행한 것을  구입하여,  표고해 거실 입구에 걸어논

    단원의 타작도와 구도가 너무나  닮은 점을 느낀다

    우선  풍속도첩의 벼타작도를 보면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언덕에서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사내 넷이 볏단 아래를 새끼줄로 묶어 개상(통나무)에 내려쳐 낟알을 털어내느라 열심이다.

    둘은 상투를 맷고 하나는 작은 고깔을 썼는데 그 틈에 댕기머리 총각이 하나 끼어있다.

    아마도 아버지와 삼촌의 일손을 거들러 나온 게 아닐까.

    일하는 데 걸리적거리지 않게 바지춤을 바싹 끌어올려 허리띠 바깥으로 넘겨 입은

    사람들도 있다. 정강이가 훤히 들어나 있다.

    고깔 쓴 사내는 허리춤에 곰방대를 꽂고 있다.

    삿삿을 쓴 채 싸리비로 낟알을 쓸고 있는 사내는 바지 무릅 부분을 끈으로 묶었다.

    일하는데 편하게 한 것이다.

    한 쪽에서는 어르신이 사방관을 쓰고 지팡이에 기댄 채 농민들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혼자 나막신을 신은 것은 낟알을 밟지 않기 위한 것 같다.

    일하는 다섯 사내의 얼굴이 모두 드러나면 밋밋할 것 같아, 세 명만 얼굴이 드러나 있다.

    모두 건강한 기운이 얼굴에 감돌고 있다.

    둔덕 위 갓쟁이는 남바위 차림에 장죽을 배슥하게 꼬나물고 어깨를 편 품세가 위엄을

    슬며시 전하고 있다. 그는 감농 역할하는 한 마름(지주의 심부름, 소작료 징수하는 역활)인 것 같다.

    수확이 기쁨은 바랑을 메고 지나가던 탁방승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왼쪽 위 논밭둑을 느릿하게 지나온 소는 길마에 볏짐을 가득하게 싣고 나나난다.

    오른쪽에는 낟알을 쪼는 암탉과 이를 지켜보는 수탉이 있고 심지어 어린 닭도 한 마리 있다.

    덕분에 가을날 추수 장면이 더욱 정겹다.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도 갈색으로 물이 들어가는 걸 보니 완영한 가을인가 보다.

    언덕 뒤 여백을 옅은 푸른색으로 물들어 가을 하늘의 푸른 기운까지 담아내고 있다

 

 

 *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

   

긍재가 그린 이곡 (화암) 병풍 1803
2곡 화암의 일부

''구곡은 어디인가 문산에 한 해가 저무누나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혔는데

 노니는 사람은 아니 오고 볼 것 없다 하더라. 

고산의 아홉 굽이 계곡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풀을 베고 집 짓고 사니 벗님네 찾아오네

아아, 무이를 생각하고 주자를 배우리라"

 

율곡 이이(李珥·1536~1584)는 34세(1569)에 교리(校理)에서 물러나 한양생활을 접고

황해도 고산군 해주의 석담에 이사와 은거한다.

오랫동안 노래처럼 부르던 ‘귀거래사’를 비로소 실천에 옮겼다

도회지를 벗어나니 마음이 한가롭다다시는 북적대는 도시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2년 뒤에는 고산구곡을 둘러보며 아홉 군데의 계곡에 이름을 붙였다.

관암에서 시작된 산책 코스는 화암(花巖), 취병(翠屛), 송애(松崖), 은병(隱屛), 조협(釣峽),

풍암(楓巖), 금탄(琴灘)을 지나 문산(文山)까지 이어졌다.

 

* 출문간월도出門看月圖

지본담채&nbsp; &nbsp;25.3 x 22.8cm

         一犬吠, 二犬吠, 萬犬從此一犬吠.

         呼童出門看, 月??梧桐第一枝.

                             < 題畵詩 >

  이를 말하는 인물은 가옥 안의 선비이다.

  선비의 심부름에 나와 선 동자가 그림에 등장했다. 동자가 살펴보니 아무 일도 없다.

  오동나무 저 끝에 달님만 둥실. 동자는 우두커니 섰다.

  그렇다면 개도 달을 보고 짖었을 테지.

  그것은 달빛에 어른대는 오동잎의 그림자였을지도 모른다

 

김득신은 영모화와 풍속화를 잘 그려 여러 폭의 그림을 남기고 있는 데 반하여,

산수화는 대작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이 〈출문간월도〉는 전통적인 산수화는 아니지만

시정적(詩情的)인 산수인물 내지는 산수풍속화로서, 그의 기량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갈필을 쓴 오동나무의 시원스런 줄기와, 농묵(濃墨)을 쓴 오동잎의 대담한 처리가 돋보인다.

더구나 오동나무에 걸려 있는 달은 나무와 대비되어 서정성을 더해주고 있다.

 

* 춘산귀우 春山歸牛

 

두마리 소와 주민들이 땔감을 만들어 새날 도성 안에 팔고 높은 고개넘어 귀가 중

 

* 유어도遊漁圖

 

근역화휘지첩&nbsp; &nbsp; &nbsp; 서울대학 박물관 소장

 

* 어웅취수 漁翁醉睡

지본담채&nbsp; &nbsp; 26.6 x 22.4cm&nbsp; &nbsp; &nbsp;간송미술관

 

* 농촌풍일 農村豊日

지본담채&nbsp; 32 x 41cm&nbsp; &nbsp; 긍재&nbsp; 전반기 작품

 

 

* 밀희투전密戱鬪錢 

지본담채&nbsp; 22.4 x 27cm&nbsp; 간송미술관

투전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들은 중인(中人)계급의 남자들로 보이는데, 투전에 정신없이 빠져 있는 모습이 각 인물들의 얼굴 표정과

몸짓에서 여실히 느껴지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로 보이긴 하지만, 교양 있는 몸가짐이나 위신은 전혀 찾을 수 없이 도박에 몰입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면 이들이 분명 양반 지식인층이 아닌 중인계급의 사람들일 것이다.

당시 여유 있는 중인들이 투전판을 벌리거나 주색잡기에 빠지는 것은 흔히 잇는 일이었다.

김득신이 바로 그러한 풍속의 하나를 그린 것이다.

화면에 그려진 인물들의 형태 표현이 주제에 맞게 자연스럽고 개성미가 있다.

안경을 쓰고 투전에 골몰하는 사람,

허리춤에 돈을 차고 패를 고르는 사람 등이 한데 모여 있다.

그림을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그림을 읽어 보면

오른쪽에 맨 먼저 보이는 것이 술상이다.

그 바로 앞에 술에 얼큰히 취해 얼굴이 불콰해진 남자가 있다.

구레나룻까지 털북숭이인 이 남자의 표정은 영 좋지 않다.

아마도 돈을 잃은 듯하다. 그것도 애써 태연한척 감추려 하고 있다.

손을 왼쪽으로 모아 패를 감추고 몸을 오른쪽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이번에 자신이 가진 패가 그리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

그의 왼쪽에 앉아 있는 안경을 쓴 남자는 왼손으로 패를 움켜쥐고

가슴 앞으로 가져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패를 숨기려고 하고 있다.

오른손으로 패를 바닥에 내려놓는데도 뭔가 조심스러운 걸 보면 그의 패가 제법 좋은 듯하다.

표정이 무덤덤하게 보이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생각 이상으로 패가 좋은데 애써 그것을 감추려하는 느낌이 역력하다.

술에 취해 얼굴이 불콰해진 구레나룻의 남자가 그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몸과 눈길이 은근히 오른쪽으로 향해 있는 것이리라.

그림 앞에 있는 두 남자는 영 패가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수염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패를 쥐고 들여다보고 있는 태도도 그렇다.

그 중 안경 쓴 남자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오른손에 패를 쥐고 있는 것을 보니

왼손잡이이다.

 

*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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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삶의 쉼표가 되는 옛그림 한 수저 2020탁현규 도서출판 이와우

옛 그림 읽는 법 2017 이종수 도서출판 유유

2023.6.4.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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