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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금강산 사생은 3차에 걸쳐 행해진다.
첫번째는 그의 평생의 친우 사천 이병연이 금화현감으로 재직하던 1711년 겸재 나이 36세되는 해로
동년 8월 그의 스승인 삼연 김창흡이 그의 시제자로써 조카뻘되는 청풍계의 주인인 모주 김시보와
송애 정동후를 데리고 그의 6번째 금강산 유람에 겸재가 따라간 것으로 이때 그려진 것이 그림 13폭의
신묘년 풍악도첩'으로 겸재의 진경산수를 연구하는데 길잡이가 된다.
두번째 여행은 그 다음해인 임진년 8월 가을에 사천의 부친인 수암 이숙과 동생인 순안 이병성
그리고 후배인 시인 국계 장응두 등 4명이었다.
이 때 그려진 화첩이 그림 30폭의' 해악전신첩'이라 하는데 불행이도 전해지지않고있다.
세번째 여행은 겸재 나이 72세된 해인 정묘년 정월 초하루에 양자를 보냈던 동생 유가 66세로 타계하는
기막힌 슬픔을 딪고 영조23년(1747) 사천과 담헌 이하곤 그리고 강원감사 우산 홍봉조와 함께 올랐다.
이때 그려진 그림이 21폭 그림의' 해악전신첩'으로 36세 때 그린 '신묘년풍악도첩'과 비교가 된다.
이 화첩은 어떤 경로를 거쳤던지 일제강점기에 친일파 거주인 송병준의 소장이 되었다가 아궁이의
불쏘시개로 들어가기 직전 골동품 거간을 하던 장형수의 눈에 띄어 간송미술관으로 옮겨져온
파란 만장한 운명을 겪었다고 한다.
이 후 '해악전신첩'은 원첩의 순서를 따랐겠지만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 화적연 > , < 삼부연 > , <화강백전> , <장자연> , < 피금정 > , <단발령망금강> , <장안사비홍교 >
< 정양사 > , < 만폭동 > , <금강내산> , < 불정대 > , <해산정> , <해산정> ,<사선정> , <문암관일출>
< 문암 > , < 총석정 > , < 시중대 > , <용공동구> , <당포관어> , <사인암사인암> , <칠성암> 이다.
불정대 신미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마하연 묘길상, 안문재 넘어지어,
외나무 썩은 다리, 불정대 올라하니
천심절벽을, 반공에 세워두고
은하수 한 굽이를 , 촌촌이 배어내어
실같이 펼쳐 있어, 베같이 걸었으니
도경 열두 굽이, 내 봄에는 여럿이라
이적선 이제 있어, 고쳐 의논하게 되면
여산이 여기도곤, 낫단 말 못 하리니 <관동별곡>
[ 彼襟亭 ]
피금정 < 海嶽傳神帖> 견본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금화에서 금강산으로 가려면 금성을 거쳐 북행하다가 창도역에서 동진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으로 간다.
금성을 거치면 성 아래 남대천변을 따라 나있는 대로변의 피금정과 만나게된다.
금성의 진산인 경파산을 미가운산식의 남방기법과 남대천변의 가로수 및 피금정은 북방기법으로 구사,
양대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대립적인 양대기법을 한 화면에서 대담하게 혼용시키는 패기와
기지를 발휘하여 겸재의 진경화법의 시작점이 된다.
위 그림은 72세에 그린 그림으로 모두 남방화법인 미가수법으로만 그렸다.
피금정 <辛卯年楓嶽圖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斷髮嶺望金剛 ]
단발령망금강산 < 海嶽傳神帖> 견본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진경산수화법의 창안을 꿈꾸던 겸재는 단발령에서 바라본 신산 금강산을 첫 대면하는 순간
홀연히 한 화법을 창안해내어 겸재화풍의 일가를 이루는 계기를 얻는다.
백색암봉은 중국 북방계의 강한 필모(붓질의 선)로 수림이 우거진 토산은 남방계의 부드러운
묵묘(붓으로 칠하는 먹칠법)로 처리하여 극단적인 음양대비를 보이면서 화면구성에서는 반드시
토산이 암산을 포근히 아래에서 감싸는 음양조화의 성리학적 우주관이 적용되는 신화풍을 창안한다.
단발령망금강산 <辛卯年楓嶽圖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金剛內山 ]
금강내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 金剛內山總圖 ]
금강내산총도 <辛卯年楓嶽圖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강내산총도 < 海嶽傳神帖> 견본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전도의 특징은 금강산 전체를 동그렇게 표현했다는 점이다.
함편 오른쪽 암산과 완쪽 토산의 경계가 동그렇게 휘어져 태극문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왼쪽 토산의 침엽수가 있는 곳 외에는 흙이 드러나 있으니 아칙 봄이 오기전인 것 같다.
막 새싹이 돋고 있는 중이겠지만 계곡에는 이미 봄물은 노가 계곡을 졸졸 흐릅니다.
오른쪽 일만이천 봉우리들은 굳센 기운이 넘치면서도 부드럽습니다. 외유내강?
정선은 금강산의 절, 암자, 계곡, 길 등 빼놓지 않고 그렸습니다.
이것들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이고 비로봉과 그 아래 중향성(금강산 내금강의 영랑봉
동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하얀 바위 성)은 반대로 아래에서 올려다 본 모습이다.
[ 長安寺 ]
장안사 <辛卯年楓嶽圖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안사는 내금강의 모든 시냇물을 한데 모아 나오는 금강천의 마지막 빠져나오는
수구안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북한강의 상류가 되는 이 맑고 큰 시내를 건너야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이 금강을 건너는 다리를 언제부터인지 석조 무지개다리 형식으로 응장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놓아 그 장려함이 금강산과 필적할만 했다.
이 다리 이름이 만천교라 하며 다리를 지나면 바로 산영루라는 누각을 만나게 된다.
장안사 <海嶽八景> 간송미술관 소장
장안사飛虹橋 < 海嶽傳神帖> 견본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장안사의 정문 문루인 산영루를 바라보며 비홍교를 오르면 그 동북쪽으로 열립한
석가봉 관음봉 자경봉 등 빼어난 백색 암봉들이 한 눈에 들어와 비로고 금강산에
들어온 느낌을 갖게된다.
[ 百川洞 ]
백천동 <海嶽八景> 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천을 따라 올라가 지장암 동쪽을 거쳐 백천동에 이르면 암벽이 기이하게 빼어나고
시냇물이 맑고 깨끗하여 정신을 맑게한다.
이곳에는 명경대라고 불려지는 큰 암석이 입석 모양으로 서 있는데 그 상부에는 수십백 인이 앉을
만하고 그아래는 마치 큰 거울을 펼쳐놓은 것깉은 수천평 크기의 원형 연목이 있으니 이것이
옥경담이다.
그림의 중앙에 돌기한 머리 큰 독립 암봉이 명경대인 모양이고 그 동쪽으로 보이는 성문이
마의태자 성문인 듯한데 옥경대만은 짙은 송림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다.
명경대 김홍도 < 금강팔경 > 간송미술관 소장
만경대 심사정 간송미술관 소장
[ 萬瀑洞 ]
만폭동 견본담채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만폭동 < 海嶽傳神帖> 견본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표훈사에서 왼쪽으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정양사가 나오지만 오릉쪽으로 금강천의
큰 물줄기를 따라가면 만폭동이 나온다.
만폭동은 내금강의 상봉인 비로봉 중향성 일대의 물이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암산 계곡을 따라
골골마다 나뉘어 흘러오다가 한데 합수되는 곳이니 완쪽 정양사 등 넘어 원통암 골짜기 물로부터
중앙의 만회암 물, 보덕굴 물 , 오른쪽 금수대 물 , 혈망봉 물 등이 모두 이곳에서 만난다.
그런데 이렇게 암산 절벽을 타고 내리떨어지는 만폭의 물길이 한데로 합수되는 곳에는 큰 마당 보다
더 넓은 너럭 내금강 바위가 펼쳐져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오선봉이라하는 독립 암봉이 우뚝 솟아 너럭바위를 가려 줌으로써 너럭바위를
더 없는 명당으로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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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1999 최완수 (주) 대원사
겸재 정선 3 2009 최완수 (주) 현암사
2016. 11. 19.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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