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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국으로 이민 가버린 R.O.T.C. 기갑학교 동기 출신 친구가 있었다.
금석학 전공인 이 친구하고는 제대 후 동기 모임에서 친교가 시작되고
같은 동내에 살다보니 동두천, 연천 등으로 바위를 보러 여러 번 동행
해 다녔다. 그 때서야 암석이 돈이 되고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필자의 취미는 강가에서 수석을 줍거나 집에서 난을 배양하는
것이었다.
항공사를 다닌 덕분에 남들과는 다르게 비행기 타고 산채를 다녔는데
언젠가 들려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채금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계적으로 골드러쉬로 유명했던 지역하면 3 곳을 들고 있다.
연대적으로 보면
1849년 당시 서부 캘리포니아로 몰린 골드 러쉬(GoldRush)이다.
원인은 금융 면에서는 1848년 1월24일 미국이 금본위제를 실시하게
되면서 부터이고, 현실적으로는 1848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트 강변
위쪽에 위치한 요한 서티의 농장 바운더리에 있던 제재소 신축 공사장
현장 책임자인 제임스 마샬이 금광을 발견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 소식이 퍼지기 전, 당시 미국과 멕시코는 국경전쟁 중이었는데 ,
1848년 2월2일 양국 간 평화협정으로 미국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유타, 네바다 5개 주를 1,500만 달러 지불하고 양도를
받는다, 물론 당시 멕시코 측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그런데 새크라멘트 금광에서만 2년간 약 4,500만 달러에 준하는 금이
채굴된다.
두 번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어난 골드러쉬인데
1851년부터 시작된 뉴 샤우스웨일즈의 웰링톤 지역 사금채취와
1852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금광도시 ‘타르 타르니굴라’로 몰렸던
골드러쉬(The Gold Rush),
그리고
세 번째가 조선시대 말인 1930년에서 시작되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한반도에서 일어난 ‘노다지’ 금맥 찾기 조선판 골드 러쉬이다.
한반도에서 금이 많이 생산된 것이 세계적으로 소문이 난 것은 사실
삼국시대(소문국과 이스라엘 솔로몬 왕과의 거래는 생략)부터라고 한다.
고려시대 원나라에서 공물로 원했던 것 중 제주도의 말린 전복과 진주는
이미 일전에 기술한 바 있고, 또 다른 주요 공물은 황금이었다.
기록(‘직산현지’, ‘연려실기술’)에 보면 고려 말 1277년(충렬왕 3년)에
직산금광 옛 지명이 등장한다.
충남 천안시 직산금광 하면 조선 말 고종 때에는 1917년 미국이 그리고
1925년에는 일본이 채굴권을 넘겨받아 막대한 금을 채굴해서 ‘노다지’
꿈의 광산으로도 유명했다.
원나라는 원조정의 관리를 직접 파견해서 금을 채굴 수탈해갔다.
제주도의 경우는 더해서 직할 식민지로 통치하며, 제주도 원주민은 다
알고 있다, 조랑말 목장도 설치하고 잠녀들이 채취한 진주와 말린 전복,
홍삼(제주 붉은 해삼)을 수탈해갔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조선의 골드러쉬 결과와 원인 현재 상태를 적어 본다.
1929년대 ~ 1934년도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1931년 일본이 금융으로 금본위제도 실행 후 조선은행이 유통시킨 1932년
의 총통화량은 약 1억2천만 원이었고 장부상의 정화준비(금화 대비 지폐교환
보관 금괴)가 약 7,500만원(금 약 56톤)이었다.
보고된 금 생산량(단위: 톤)은
1929년 1930년 1931년 1932년
31.173 26.462 24.138 24.127
그런데 1934년 조선에서 생산한 금 총생산량은 공식적 6.342톤이었는데,
일본이 1월에서 5월까지만 공식적으로 금을 일본으로 송출해간 횟수가
총 44회로 한번 송출한 량이 금 100kg 였고 그해 총 송출량이 10톤이었다.
사실 1931년 12월 이후 조선반도의 금 수출을 금지한 후 비공식적으로
생산된 황금량만도 엄청난 양으로 추정되는데 1934년도 5월 조선은행(일본
은행 자회사) 지하 5층에 보관된 3중 시건장치 금고 속에는 금붙이가 불과
몇 조각뿐(금괴는 어디가고)이었다고 한다.
사실은 정화준비 금이 56톤이라면 금괴 1개가 10관(37.5kg)짜리 금괴라면
1,500개가 있어야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이 1929년 금융 공급과잉 유효수요 부족, 통화정책
실패, 주식시장 투기 등으로 경제 대공항(1929~1933년)을 겪은 것처럼
일본도 1920년 제1차 대전 전후 공항, 1923년 관동지진 지진공항, 그리고
1927년 쓰나미 처럼 쇼와금융공항을 겪게 된다.
쇼와금융공항의 내용은 잠시 살펴보면,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1905년 노일해전 승리로 세계 5대 강국으로 상승,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만주국 수립, 1937년 중일전쟁을 실행한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리더 전제국가 중 하나였으므로 1920년 벨기에 브리셀 금융회의에서
금본위제도를 채택하기로 열강에게 약속했다.
그래서 당시(1929년) 민정당 대표인 하마구찌가 동년 6월5일까지도 금해금은
없다고 언급하다가 7월 총리 취임 후 , 11월21일 금본위제도 도입을 선포한다.
결과적으로 1930년 1월11일 금수출(해금)를 승인하게 된 것이 쇼와금융공황의
근본 원인이 됐다고 한다.
그래서 1931년 1월부터 12월까지 시행했던 금본위제도가 멈추게 된다.
1930년 1월 금해금 이전까지 정부 금 매입가가 2돈에 5원 주변이던 것이
쇼와 7년(1932년)말에는 8원에서 10원까지, 쇼와 8년에는 11원 60전->13원
50전까지 치솟았다. 다시 말하면 1930년 1월 이후 일본은행이 금을 꾸준히
매입하게 되면서 금값이 폭등했다.
1933년 한 해만도 도당 260개 금광이 개발되었는데 1933년~1934년 2년간 금광
거래 가격이 10만원(약 1백억원)으로 매매된 금광이 무려 87건이나 되었다.
조선은 ‘농자천하지대본’국가로 경제의 근간이 농사인데 쌀 정부구입가가 밑 빠진
듯 추락해서 한반도 조선인들의 삶은 가시밭길(초근목피 먹는)이 된다.
1929년 조선반도 쌀 생산량이 1,300만석일 때 벼 한 섬 가격이 23원 57전이던
것이 금비(화학비료) 사용으로 풍년들어 1,900만석으로 생산된 1930년도 한 섬
가격은 13원 12전, 1931년에는 6원으로 추락한다.
일본은 싼 가격으로 생산량 대부분을 구입 본국으로 송출하지만 조선인은 살길이 막혀
고향땅을 등지게 된다. 당시 한 달 월급이 은행원이 70원, 운전사가 38원, 여직공이
6원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결국 백수 포함 조선인들이 그나마 손쉽게(?)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광업권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30년대에 조선에는 광업권에 투기바람이 휘몰아치게 된다.
현실적으로 금보다는, 가진 게 없어, 금광을 찾는 것이었다.
왜냐면 광업권 허가증은 일반적으로 당시 1백20원만 있어도 발급받기가 가능했기 때문,
이 證은 출원증 상태에서도 거래되었다.
그리고 금광의 출원, 심사, 등록하는데 부대비용 포함 3백50원으로 광업권 등록 가능했다.
조선의 골드러쉬는 광업권 투기였다.
1933년 광산으로 개발 허용된 곳이 5,025 개소 그중 금광이 3,222 개소 더하기 전국
무허가 광산을 생각해보면 과히 짐작이 가능하다.
적다보니 글을 쓴 양이 너무 많( 요즘은 오래 읽기 싫어함)아 이만 생략하고 최근 발행된
유튜브를 올려 대신하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 금 노두 탐사
2.한반도 금광의 땅
3.금광석 제련
4. 금맥과 석영 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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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11. 한바다
참고서적 : 황금광 시대 2005년 전봉관 (주)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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