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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haanbada 2022. 11.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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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조선의 3대 임금,  태종 5년인 1405년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세웠다.

지금의 창덕궁이 있는 향교동에 이궁을 짓도록 명한 것은 법궁인 경복궁을

건설한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창덕의 의미는   “덕의 근본을 밝혀 창성하게 하라.” 뜻

'인군은 창덕에 힘써야한다. --이에 명하노라, 창은 창하게 성은 성하게 하라는

뜻이니 , 덕으로 이름함은 덕의 근본을 밝히고 성을 본받고 덕에 힘쓰라, 덕에

힘쓰면 국운이 길고, 국운이 길려면 오직 덕에 부합해야 한다.' <창덕궁지>

창덕궁은 경복궁에 비해 왕의 의도데로 설계되어 후원을 비교적 넓게 만들었는데

왕권이 강했던 세조 때에는  후원을 2배 정도 더 확장했다고 합니다.

지형의 조건을 살려 궁궐 건물을 앉혔고,  나중 동쪽에  창경궁을 생활의 공간으로

세워 확장하여 사용하도록 함.

*  창경궁은 성종 14년에  3 분의 대비; 전희왕후 윤씨(세조 비), 소해왕후 한씨(덕종 비), 안순왕후

   한씨(예종 비)를 위해 지은 궁궐.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모두 불탄 후 1610년 광해군에 의해 복원되면서 270여 년간

조선의 법궁으로 사용하게됨.

현재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 중 유일하게 후원 영역이 잘 보존된 창덕궁은 건축물과

자연 경관의 조화가 뛰어난 궁궐건축을 보여준다.

한국 전통 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세계적인 정원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전체관리 면적은 약 13만 평(4,297만 5,400㎡)으로 전각영역이 4만 평(1,322만3,200㎡)

이고 후원 영역이 9만 평(2,975만 2,200㎡)이다.

 

 

* 돈화문(보물 383호)

 

태종 12년(1412)에 처음 지어졌고 임짐애란 이후 관해 원년(1608)에 증수함.

돈화란 <중용>의 ‘대덕돈화’에서 인용한 말로 ‘ 임금의 큰 덕을 베풀어

교화를 도달하게 하다.‘ 란 의미로 쓰임.

돈화문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을 달아 백선들에게 시각을 알리거나 급한 일이

있을 때 알렸다.

 

정오와 인정 때에 종을 울리고(인정:밤 10시 경 통행금지 알림 28번 침), 파루(통행

금지의 해제를 를 알리는 33번 북침)에는 북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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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현재

 

1926년 순종 승하 후 방치된 상태

 

동궐도 1827-1830년

 

* 금호문

 

창덕궁의 서문으로 금은 오행사상 중 서쪽을 의미한다.

사헌부 관리들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출입했지만, 나머지 관리들은 금호문으로 통행했다.

그리고 북쪽에 경추문, 요금문이 있고, 돈화문 동쪽에는 단봉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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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문

 

 

* 금천교( 태종11년 1411년)

 

배산임수의 조건으로 명당수를 궁궐의 외전영역으로 인위적으로 끌어들인

냇물 위에 세운 다리가 금천교이다.

태종 11년(1411)에 박자청이 축조하였다.

보물 제 1762호 < 금(禁)천교가 아니라 錦川橋이다>

모든 궁궐의 외전 영역에는 반드시 금천이 있어 잡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금천교의 다리 밑을 보면 두 개의 무지개(홍예)를 틀어서 다리 상판을 떠받치고 있는

것을 볼 수있다.

다리 난간에는 하엽을 두르고 안상을 뚫어 꽤 정성스레 치장을 했다.

난간과 홍예의 동조각은 경계의 상징이다.

금천교 홍예 북쪽에는 현무를 의미하는 거북을 놓았고, 남쪽에는 성군의 출현을

상징하는 백택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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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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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문

* 인정전

 

인정(仁政)은 ‘어진 정치’라는 뜻으로, 특히 맹자가 강조한 왕도정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덕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으로 의식공간입니다.

왕의 즉위식, 세자책봉식, 가례, 조하와 외국사신 접견, 과거시험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은 정면 5칸과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밖에서 볼 때 2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1층으로 천정이 높은 통층 건물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에서 유일한 국보 건물로 국보 제 22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단의 월대 위에 2층으로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1405년 창덕궁이 창건되었을 때 정면 3칸의 규모로 지어졌다가 태종 18년(1418)

에 더 넓게 개조되었다. 그 뒤 암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대에 중건됨

인정전의 높은 궐대와 지붕의 잡상은 임금의 권위와 존재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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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

 

1920년대 방치된 모습

 

* 조정과 박석

 

인정전 문지방을 넘어 들어서면 문밖과 다른 장엄한 네모반듯한 마당이 있는데

이곳이 왕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던 조정으로, 임금과 관리들이 예로써 만나는 의식

공간이다.

마당에는 거칠게 다금은 박석이 깔려 있다. 실질적으로는 비가 올 때나 비 온 뒤,

또는 바닥의 물기로 땅이 질척거리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과 함께 시각적으로는

박석이 주는 장중감도 있다.

박석은 매끈하게 다둠은 돌이 아니다. 화강석이 주는 거친 질감을 최대한 살리면서

돌의 결을 따라 얇게 떠낸 바닥 포장용 돌판입니다.

원래 조선시대의 궁궐의 박석은 주로 황해도 해주와 강화도에샤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순종 승하 후 화단 조성 명목 하 박석 들어내기

 

* 후 원

창덕궁을 창건한 이듬해 1406년에 해온정을 짓고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창덕궁 후원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 왕은 세조다. 

세조 8년 창덕궁 후원이 얕고 좁다하여 인근의 민가 73가구를 철거하고 경역을  

대폭 넓혔다.

 비원 : 비원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종실록>에 비원은 창덕궁 안 후원을

관리히며 지키는 사무를 맡아본다 라는 기록이다.

 

고종 40(1903) 12월 30일 기사

포당 제108, <궁내부 관제 중 비원 증치 안건>을 반포하다>

비원은 창덕궁인 후원을 관리하며 지키는 사무를 맡아 본다.

감동 2인은 각부와 부원의 칙임관 중에서 겸임시키며 검무관 3감동 1인은

주임관이고 주사 4인은 판인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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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정과 부용지

 

창덕궁 후원 이곳 주합루 일대에서 서남쪽으로 연못가에 수줍게 걸쳐 있는 정자가

부용정이다. 숙종 33년(1797)에 세조 때의 우물 자리에 연못을 파고 그 연못가에

택수재라는 집을 지었다.

그 뒤 정조 초년에 연못을 다시 고쳐 만들고 탯재도 고쳐 짓고 이름을 부용정이라함.

부용정은 아자(亞字)형의 맵시 있는 정자로 이름 그대로 막 피어나는 청초한 연꽃

형상이다.

됫마루 주위로 난간을 둘렸고, 정자 내부의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의 마루는 한 단을

높여서 이곳이 임금의 자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네모난 연못과 가운데 둥근 섬은 도가사상의 천원지방에 근거하여 인공으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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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주합루

 

* 규장각과 주합루

 

부용지 북쪽으로 높은 계단 위에 지어진 2층집은 주합루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1776년 정조 즉위년에 지은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왕실의 서고인 규장각이고

위 층은 주합루로 열람실이다.

‘주합루’란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주합은 육합(상하와 사방을 의미)을

가리키는데 곧 천지를 의미한다.

규장각은 정조 시대 개혁정치의 본산으로 그 중추가 되었던 기관이다.

1776년 3월 경희궁에서 즉위한 정조는 즉위한지 석달이 지났을 무렵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짓도록 명하여 9월에 완공 시켰다.

이때 완성된 누각은 2층으로 처음에는 ‘주합루’라는 현판을 달았다가 뒤에 숙종조의

현판인 규장각을 옮겨 달았다. 규장각의 ‘규(奎)’는 별자리 28수의 하나로서, 중국은

황제가 지은 문한이나 어필을 규장이라고 하였는데, 규장각이란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가 빛나는 집이라는 뜻이다.

 

한편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의도를 알 수 있게 하는 정책이 규장각에서 주관한

초계문신제였다. 초계문신제란 37세 이하 연소한 하급 관리들 중에서 과거 급제 후

승문원에 임시로 소속된 관리들 가운데 능력있는 자를 의정부에서 뽑아 40세까지

교육시키는 제도였다.

이들 문신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 규장각으로, 규장각에서는 매월 초하루에 이렇게

선발된 관리들을 시험 보아 그 성과를 가렸다.

정조는 또한 이들의 교육적 실효를 위하여 실직에 있는 경우는 그 근무를 제외시켜

주는 등 많은 혜택을 부여하였다.

정조가 이렇게 이들에 대해서 많은 특혜와 혜택을 주었던 것은 결국 이곳을 자신의

통치기반으로 하려고 하였던 것이며,

초계문신제를 통해서 선발된 인원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을 양성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국왕 정조의 이러한 학문 진흥 노력은 결과적으로 정조대에 많은 서적들이 간행되면서

서구의 르네상스에 준하는 문예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정조가 직접 주관해서 만든 책만도 약 2,400여 권에 육박하며, 이밖에도 많은

책들이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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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과 어수문

 

 

* 어수문과 취병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주합루로 오르는 정문이 어수문이다.

어수는 ‘물고기와 물’을 일컫는 말로 ‘수어지교’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물고기는 신하, 물은 정조 임금입니다.

물고기는 물으 떠나 살 수 없듯이 그의 신하들은 완의 뜻 안에서 황약하라는 정조의

강력한 왕권을 표방하는 문 이름이다.

어수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대나무로 틀을 짜서 만든 생울타리 담장이 보인다.

바로 취병이다. ‘취병’이란 말 그대로 푸른 평풍 담장이다.

생나무로 엮은 취병은 돌이나 벽돌을 쌓아 만든 담장 보다는 여유로운 차단 효과를 주는

전통방식의 울타리 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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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기 비각

* 사정기 비각

 

부용지 서쪽에 이곳 부용지 일대의 유래를 말해주는 작은 비각이 있다.

그 비각을 지금은 사정기비각이라 하는데, 본래 이름은 술성각이다.

세조 때 영순군 이부와 오산군 이주로 하여금 이곳에서 연못을 찾게 하여 2 개씩

모두 4 개의 우물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병화를 겪으며 깡그리 없어져

두 우물만 남았다.

숙종이 이를 안탂깝게 여겨 남은 우물 2개를 수리한 후 우물의 역사를 담은 비석과

비각을 숙종 16년(1690)에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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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9. 주합루, 영화당

 

영화당

 

* 영화당

 

영화당이 처음 창건된 것은 광해군 대의 일이지만 지금의 건물은 숙종 18년(1692) 때

터전에 재건한 집이다.

영화당 동쪽의 넓은 앞뜰은 춘당대의 일부로서 정조 이래로 임금께서 친히 납시어 과거를

보던 과거장이기도 했다.

<궁궐지(宮闕志)>에서는 이 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영화당은 15간 짜리 이익공 집으로, 기둥 길이가 8.7척에 양통은 어간이 10척, 앞뒤 퇴가

4.5척이며 도리통은 3간에 8.3척씩인데, 그 남쪽의 남행각 7간에 의춘문이 있고

다시 남쪽으로 둘린 담장에는 일각문인 영화문이 있었다.‘

지금의 영화당은 정면5간, 측면 3간에 단층 팔작 기와지붕의 이익공 집으로,

높직한 장대석 기단 위에 툇간 3면이 모두 트인 정자 형태로 지어져있다.

정면은 사람이 거처하는 방 한 칸만이 온돌방이고, 대청 2간과 3면의 툇간은 마루이다.

왼쪽 툇간에는 아궁이를 낸 골방을 꾸며 놓았다.

 

정조 때부터 이곳 영화당 동쪽 넓은 마당에 과거장을 마련하고, 영화당에 임금이 친히

참석하여 전시(殿詩)를 보여 인재를 뽑았다고 한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문과, 무과의 과거시험이나 또는 군대를 열병할 때면

배설방이라는 곳에서 언제나 영화당 처마 앞에 긴대나무 장대 7개를 버팀목으로 세우고

큰 차일을 치는데, 차일이이 어찌나 크고 넓었던지 그 옆에 서 있는 나무까지 차일 밑으로

덮일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당 섬돌에 잇대어 붉은 널판을 걸쳐 놓은 용수석은 그 위에 300여명이나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또 아래로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을 만큼 높아서 위로 오르내리는

계단이 아홉층이나 되었다 한다.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영화당 현판은 정조의 어필이었다고 한다.

또한 선조, 효종, 현종, 숙종의 어필들이 모두 이곳 영화당에 편액으로 걸려있었다고 한다.

* 춘당대

  영화당 동편의 춘당대는 서총대라고도 불렀다.

서총대는 연산군 대에 건축되었는데, 연산군은 재위 11년(1505) 창더궁 후원에 동서로

높이가 열 길이나 되는 석대를 만들고 용을 아로새깅 돌 난간을 설치했다.

춘당대의 너른 마당에서 조선 전기부터 전시라는 과거 시험이 치러졌다.

초시와 복시를 거쳐 마지막 시험인 전시를 치룬 장소 중 하나가 춘당대이다.

춘당대에서 특별시험을 봐서 급제한 내용으로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에 등장한다.

<춘향전>에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한  춘당대 '시제'가 "춘당춘색이 고금 동이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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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합&nbsp; 금화문

 

이두합 운경거

 

앞쪽이 서재인 운경거

 

* 의두합

 

금마문은 원래 중국 한나라 때 미양궁 안에 있던 문 이름으로 문 옆에 동으로 만든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금마는 한나라 때 국가에서 책을 보관하던 곳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금마문을 지나면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의 독서당인 기오헌이 보입니다.

기오현에 많은 책을 비치함으로써 한나라의 전통에 따라 금마문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궁궐지>에 의두합은 영화당 북쪽에 있는데 옛날 책 읽던 자리라고 했다.

‘의두’는 ‘북두성에 의거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북두성은 바로 효명세자가 닮고 싶었던

할아버지 정조를 가리킨다.

효명세자는 할아버지인 정조의 뜻을 이어 왕권을 강화하고 세조정치를 타파해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22세에 절명했다.

의두합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던 1827년(순조 27년)에 지었다.

건물의 이름은 의두합이지만 기오헌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궁궐 건물들 중 유일하게 북향(北向)이다. 책읽고 공부하는데 햇볕 잘 드는 남향으로 지으면

편해 질까봐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대석 한 단 위에 사고석 4단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장대석

1단을 두어 축대를 만드는 등, 다른 궁궐 건물에선 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현판은 동쪽(정면 기준 왼쪽)에서 2번째 칸의 교창에 달려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다.

현판에는 '의두합(倚斗閤)'이 아닌 '기오헌(寄傲軒)'으로 써두었다.

'기오(寄傲)' 뜻은 '거침없이(傲) 호방한 마음을 기댄다(寄)'이다.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이 쓴 시 《귀거래사》의 구절에서 따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에 기대어 멋대로 호방함을 부려보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좁은 집이지만 편안함을 알겠노라.

의두와 기오라는 말에도 효명세자의 정치적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의두’는 북두성에 의지한다, ‘기오’란 높은 곳에 기댄다는 뜻인데 두 단어를 결합하면

북두성에 의거하여 이상적 정치를 실현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 운경거

  의두합 서쪽에 있는 건물이다. 의두합과 같이 지었다. 효명세자는 이곳도 책읽는 곳으로

사용했으며 책과 악기를 보관하는 용도로도 썼다.

의두합과 마찬가지로 북향(北向)이며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정면 2칸, 측면 1칸, 총 2칸이나 말이 2칸이지 마루가 반 칸. 온돌방이 한 칸인 소박한 건물이다.

 

그리고 기오헌 뒤의 급경사지에는 여러 층의 석축과 규장각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습니다.

기오헌 뒤쪽 축대에 새긴 ‘초연대’와 나란히 ‘추성대’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초연’은 세속을 초월한 모양, ‘추성’은 가을에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란 뜻으로 바람소리.

낙엽지는 소리, 벌레 소리 등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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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문

 

중문인 수인문(좌)과 장양문(우)

 

안채

 

사랑채와 선향재

 

뒷편 통벽문 , 건물 앞뒤로 내외담이 있다.

 

동궐도에 그려진 연경당, 의두합, 주합루

 

* 연경당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1828년(순조 28년) 아버지 순조의 40세 생신에 존호를 올리며 의례를 행하기

진연처로 창건하였다. ‘연경’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순조 28년 11월 효명세자가 직접 아버지 순조에게 사순영을 열 것을 주청하였고, 순조의 허락을

받은 세자는 곧바로 진찬소를 설치하여 연회를 주관하였다.

 

연경당 대문은 솟을대문이고 ‘장락문’이라는 편액이 달려있다.

연경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장락문 대문 앞에는 괴석을 담은 석분을 놓았는데, 석분의 네 모서리에

두꺼비를 조각해 놓았다.

두꺼비는 월궁 항아의 상징으로 이곳이 신선이 사는 선경을 암시하고 있다.

연경당 서쪽 바깥 담장 밑으로 흐흐는 물은 대문 앞을 지나 어수당 터 연지로 흘러든다.

장락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문앞의 명당수를 건너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물을 은하수라 하고 그 위에 놓인 돌다리는 오작교라 부릅니다.

즉, 이곳이 신선세계임을 암시하는 장치입니다.

장락문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행랑채와 헛간이 있고 그 옆에 마구간과 하인들이 사용하던

측간도 있다.

문 안으로 두 개의 중문이 있는데, 동쪽에는 사랑채로 통하는 장양문, 서쪽에는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이 있다. 장양문은 솟을대문으로 종2품 이상의 사대부가 초헌을 타고 드나 들 수 있도록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아오른 문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수인문보다 높다.

평대문인 수인문 앞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를 정심수라고 불렀다.

정심수, 늘 마음가짐을 정갈히 하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장양문 앞에 놓인 두 개의 받침돌은 ‘정료대’라고 하여 솔가지를 얹어 태우거나 등롱을 놓아

불을 밝히는 조명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장양문을 들어서면 내외담으로 나누어진 연경당 앞마당에 서게 된다.

연경당이란 이 집 바깥주인의 거처인 사랑채의 당호로 사랑채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사랑방과 누마루로 나누어져 있다. 누마루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문객과 더불어

시정을 논하고 담소하는 사대부들의 사교의 장이 었다.

사랑채 마당 서쪽으로 나지막한 담장이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이 있다.

남녀가 유별한 조선의 유교적인 사회에서는 남녀의 공간은 엄격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이 담은 그 엄격한 개념의 중간에 살짝 걸쳐져 있어 그다지 높지 않거나,

담장 끝이나 길어지면 양편에 쪽문이 있어 이 작은 문을 통해 사랑채와 소통했다.

사랑채 오른쪽에 위치한 안채는 안주인의 생활공간이다.

사랑채와의 사이에 담장이 있어 별개의 건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내부가 사랑채와

연결되어 하나로 통하는 건물이다.

안채 뒤 북쪽 담장에는 통벽문이 있어, 그 문 너머로 안채에 딸린 부엌 반빗간, 부엌 광

마루 온돌방이 있는, 공간으로 연결됩니다.

 

연경당 동쪽 행각은 ‘맑은 물이 두르고 있어 학문을 논하기 좋다.’는 의미의 청수정사이다.

문인 문객들이 와서 머물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랑채 동쪽에 위치한 선향재는 문인을 접대하던 서재이다.

‘선향’이란 독서의 향기를 말한다. 서향의 집이라 석양빛을 가리기 위해 맞배지붕의

처마 앞쪽으로 동판으로 만든 인갑문 차양으로 덧대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삼끈과

고패로 기울기를 조절할 수 있는 이중 차양을 설치했다.

선향재 뒤편의 화계 제일 높은 곳에 농수정이 있다. 이 농수정 옆 아래에는 태일문이

있는데 이 문을 통해 담장 밖 후원으로 통하는 길이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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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우사&nbsp; 존덕정

 

* 폄우사와 그 주변

 

애련정의 뒷동산 너머로 접어들면 , 처음에는 둥근 연못, 그 다음 네모난 연못 2 개가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있고, 그 안쪽 중심에 겹 지붕을 한 육면정이 서있다.

육면정은 지금의 존덕정과 위치가 같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존덕정을 바라보는 왼쪽 언덕에 펌우사가 보임니다

효면세자가 돗처로 삼았덩 곳이다. 집의 이름은 ‘어리석음을 경계하다’라는 의미이다.

펌우사 앞에는 옛날 누군가 양반내의 팔자걸음을 연습하던 판석도 있다.

오른쪽 언더에는 승재정이 있고 조금 더 내려오면 존덕정 앞에 서게 됩니다.

존덕정은 인조 22년에 자었고, 육각으로 되아 있어서 처음에는 육면정으로 불리어졌었다.

지붕은 두 겹으로 아래쪽에 눈썹 지붕을 올리고 꼭대기애 절병통을 얹었습니다.

정자 안쪽을 보면 천정 내부에는 청룡과 황룔이 어우러져있어 아 정자의 격을 알 수 있다.

북쪽 창방에는 정조가 쓴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글의 제목은 “천명월주인옹자서”로 내용은 정조 자신을 달에 비유하였고 달빛이 만개해

개울을 고루고루 비추듯이 만백성을 보살피겠다는 애민사상과, 하늘에 달이 하나이듯

임금도 오로지 정조 자신 뿐이니 이에 대한 도전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강력한 왕권을

주장하는 개혁 군주로서의 정치관을 보여준다.

존덕정에 딸린 연못을 반월지라 부른다.

존덕정의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 우측 아래 쪽에 관람정이 있다.

관람정의 형태는 매우 특이해서 부채꼴 모양의 평면으로 되어있다.

6개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고, 그 중 2개의 기둥이 반도지에 발을 담그고 있다.

정자에 붙어 있는 파초잎 모양의 현판도 흥미롭다. 그리고 반도지 역시 호리병 모양의

곡수지로 형성되어 있어 특이하다.

얼핏 한반도 모양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여서 반도지라 불린다.

그런데 부채꼴 모양을 한 관람정은 일찍이 조선 건축 양식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재까지

유일한 형태이기 때문에 대부분 관계 전문가들은 일제의 영향력이 중대되던 당시에 이곳

반도지와 관란정이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존덕정과 반월지

 

존덕정 천정과 편액

 

관람정과 반도지

 

숭재정과 존덕정 관람정

* 옥류천 주변 정각

    옥류천 일대는 1636년 인조가 응봉 자락의 계곡과 물길을 이용하여 조성한 곳이다.

 옥류천 가장 깊은 곳에는 닌조 대에 판 어정이 있고, 어정 밑의 냇가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L자 형태로 깎아 만든 폭포가 있다.

 암벽에는 옥류천이라 새긴 인조가 친필 각자와 숙종이 지은 오언절구가 있다.

 

취규정

 

취한정

 

소요정

 

청의정&nbsp; 태극정

 

옥류천&nbsp; 소요암&nbsp; 소요정

 

비류삼백척 폭포

 

폄우사 서쪽 산 너머의 골짜기에는 취한정, 그 서쪽에 취규정이 있고 이들 정자의 서북쪽

다른 골짜기에는 옥류천이 흐르는 곳으로 태극정, 농산정, 소요정, 그리고 청의정이

자리잡고 있다.

창덕궁 후원 중에 가장 깊숙하고 보존상태가 좋은 곳이 옥류천 지역인데 자연경관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과 조하를 이룬 배치가 조선 정원의 진수를 보여준다.

취규정은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산마루터기에 위한 정자이다.

‘취규’란 별들이 규성으로 모여든다는 뜻으로 뛰어난 인재가 많이 모여든다는 의미고

있다고 한다.

취규정을 지나 오른쪽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처음 만나는 정자가 취한 정이다.

숙종 연간에 지어졌으며 왕들이 옥류천에서 물을 마시고 나오다 잠간 쉬어가는

정자라고 한다.

취한정에서 돌다리를 건너면 소요정을 만납니다.

‘소요’란 유유자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요정에서 바라보는 커다란 바위에는 인조 어필로

옥류천이라고 쓰여져 있고 그 위에 1670년 숙종이 지은 오언결구의 시가 조각되어 있다.

옥류천의 소요암 폭포에 당도하여 숙종의 시를 읽으면 , 당시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감성이 풍부한 시인 묵객의 은유와 과장으로 표현한 ‘비(飛)류(流)삼(三)백(百)척(尺) /

요락(搖落)구천(九天)래(來)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은 옥류천 지역에서 경치가 뛰어난 상림삼정리라 한다.

청의정은 궃궐 안에 있는 유일한 초가 정자이다.

청의란 맑고 잔잔한 물결이라는 뜻이다. <동궐도>에 보면 본래 청의정과 태극정은

나란히 연못을 끼고 있는 정자로 이곳 청의정 앞은 논이 아니라 연못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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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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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 읽기     2005     총괄 최종덕    문화재청 창덕궁 관리소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창덕궁    2013    이향우   인문산책

조선의 집, 동궝에 들다.                 2006      한영우      열화당

 

2022. 6. 19.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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