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나/나의 이야기

김춘수의 詩 감상

haanbada 2024. 5. 12. 23:39

**

'무의미'는 시편에서 새로운 시적 의미를 생산하는 주요한 원천이다.

주요한 시적장치인 '역설, 비유, 상징' 등을 살펴보면 무의미 양상과

밀접하게 결부돤 것임을 알수 있다.

그의 무의미가 '의미의 대상의 없음'이라는 일반적 개념의 것이 아니라

무의미시에서 '무의미'는 다양한 의미의 산출 지점인 것이다.

무의미의 여러 유형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나 시적의미 형성과 시의

분위기를 조성에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한다.

무의미와 무의미를 통한 의미의 생산 방식이 '무의미'의 '계열화' 이다.

무의미의 어구가 계열화하는 주요한 의미는 시인의 '자전적 트라우마'

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역사나 폭력적 이데올로기로 부터 개인이 겪는

피해(일제 강점기 감옥체험 등)와 결부되면서 억압에 강하게 비판적이다.

인간의 현실적 고통을 대변하는 인간적 모럴에 대한 웅호는 무의미시의

저변에 나타나는 시인의 의식과 관련을 지닌다.

인간적 모럴은 그것이 시험되는 비극적 운명에 처한 인물의 상황과

맞물려있다.  비극적 운명에 처한 인물의 대응방식은 초월, 위안,

개척의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공통적인 극복방식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으러 나타난다.  시인은 고통을 위로하고 고통으로부터 탈피하고져

하는 방식으로서 '무의미' 의 언어를 선택한 것이다.

특히 고통은 시인이 작중 인물들을 통해 주요하게 형상화한 문제이다.

그가 가치부여하는 '고통'은 절대성의 영역을 공유한다.

현실의 고통속에서 인간적인 선을 구현하고져 하는 삶이라 결국

신이 지니는 사랑의 영역과 합치된다고 보는 것이다.

 

                                    - <김춘수 무의미시 연구> 에서 : 최라영  -

**

 김춘수는 19221125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서정(현 동호동)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예술학부에서

공부했으나, 1942년에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판하여 1943년에 퇴학당했다.

1946년에 귀국하여 1951년까지 통영중학교, 마산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했다.

1946년에 詩 애가 를 발표하면서 등단, 이 때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다.

 

1948년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 출간을 시작으로 詩 산악(山嶽) 사(蛇)

기(旗)  모나리자에게 꽃을 위한 서시 능금 등을 발표하였다.

다른 시집으로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1959 타령조 기타 1969 

처용(處容)1991 남천 1977 비에 젖은 달1980   등이 있다.

산문시집『서서 잠자는 숲 1993 은 30여 년 간 시도했던 ‘무의미시’의 종착점에서

의자와 계단1999   거울 속의 천사2001    쉰 한편의 시가2003   에서

 그 간의 방법론적인 긴장을 풀고 자유롭게 시상을 전개하였다.

 

김춘수는 언어와 대상 간의 관계를 고민하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투했던 시인이자

시 이론가였다.  그가 제시한 ‘무의미시’는 우리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시문학사에 깊게 각인돼 있다.

특히 존재의 탐구, 대상의 즉물적 제시, 현실의 실감을 허무의지로 승화시켰던 점에서

당대는 물론 한국 문학 미래의 한 축을 담당한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946년 <육필시집>에서

 

*

    [ 꽃 ]

 

존재의 본질과 의미, 그리고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을 탐구한다.

꽃은 존재의 가치로서 인식되고 싶은 인간의 꿈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름 때문에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이 불리어짐으로

일차적으로 존재가 된 것으로 이 나타남은 이름으로만 나타난 것이

아닌 존재의 가치로서 나타난 것으로 인식되기를 바란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은 이름을 가짐으로써 그것으로 인식된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먼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가 나의 의미가 되었을 때

나도 그에게 이름이 불리어지고 그의 의미가 될 수 있으리라.

서로의 빛깔과 향기를 나누어 가지며 동화되어 가는 과정이

의미 있는 관계가 아닐까 서로에게 스며들어 하나가 되어가는 건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사람에게서 가장 많은 상처도 받지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최고의 평안은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서로가 의미 있는 관계가 되어 사랑하고 아껴주며 살아간다면 .

 

 

 

꽃의 소묘(素描)/ 김춘수

 

1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香氣)며

화분(花粉)이며……나비며 나비며

축제(祝祭)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追憶)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追憶)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2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微笑)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純金)의 천(阡)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3

 

네 미소(微笑)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侵犯)할 수는 없다.

 

금술 은술을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七寶花冠)을 쓰고

그 아가씨도

신부(新婦)가 되어 울며 떠났다.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간(肝)을

쪼아 먹는다.

 

4

 

너의 미소(微笑)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멀고 먼 곳에서

너는 빛깔이 되고 향기(香氣)가 된다.

나의 추억(追憶)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너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

 

                                꽃의 소묘 1959 에서

*

 

꽃은 완벽한 존재의 본질 또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완전한 모습

그러나 현재는 완전한 무결점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존재인 꽃은 추억에만 있다.

꽃의 이슬이 한 방울 떨어진다는 것은 그 무결했던 존재를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외롭고 슬픈 것은 그 완전 무결한 존재와 무관한

존재가 되어 버렸지만 그 존재처럼 되어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꽃의 가장자리는 눈부신 천(阡)의 눈을 가진 대상으로

그 빛깔은 화사한 생명 중의 핵이다.

금술 은술 느리운 칠보화관인 이 화분은 절정의 부심이다.

그러나 칠보화곤을 쓴 신부조차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완전 무결점 존재인 꽃 아무도 근접이 할 수 없고

그래서 세속적인 존재인 신부들도 부정적 존재가 된다.

꽃은 사랑의 불 속에서도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 불태우고 지는 꽃이 존재하듯

그 아가씨도 신부도 울며 떠날 때

꽃은 아가씨의 미소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다.

너의 미소(꽃)는 별이 된다.

우리와 떨어진 먼 곳에서 너는 우리가 지향할 빛깔이

되고 존재의 본질적 속성인 향기가 된다.

 

 

*

 

꽃의 위한 서시(序詩)/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 꽃의 소묘(素描) 1959에서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언어와 존재'에 대한 김춘수 시인의

고민과 탐구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난 시가 <꽃을 위한 서시>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대상을 이름이란 언어로 지칭하고 사용하면서

'대상의 본질'을 망각하고 그저 이름으로 부르고 이름이 본질인지

본질이 이름인지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그저 수긍하고

도구적 언어를 사용한다.

 

인식의 주체인 '내'가 그 대상이 되는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간절한 소망('돌'에서 나아가 언젠가는 승화된 '금'이 될

것이라)과 노력을 '울음'이 '돌개바람'이 될 정도로 치열한 노력을 지속한다.

이 소망과 노력으로 어둠은 빛의 세계(금金)가 된다.

존재 본질의 근원적 규명을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라고 표현하여

'너'라는 존재에 대한 추구 의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존재는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잠시 이름도 없이 피었다지'는 것이다.

시인의 추구하는 존재내지 세계는 잡히지 않는 실재와 같은 것이다.

잡히지 않는 실재의 세계로 인해 나는 무명의 어둠 속에서 한밤내 운다.

인간 언어의 한계를 느끼며 '비애', '울음' 등으로 형상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이 시인의 초기 시에서 주요한 테마는 '물체적인 것 저편'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언어의

기호성: 언어는 의미라는 내용과 말소리 혹은 문자라는 형식이 결합된

기호로 나타난다는 특성. 언어의 자의성은 기호성에서 비롯

자의성: 언어의 내용과 형식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없고

의미와 소리의 관계가 임의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특징

 

언어의 특징인 '자의성'이란 개념으로 더 이상의 의문을 부치지 않는다.

'대상의 본질'에 대해 오히려 인간이 어떻게 쓰는가에 의한 기준에 의해

의미가 부여 되고 있고, 대상의 본질(이데아)은 오히려 숨어 버리고

이름을 통한 도구적 의미만 남아있다.

 

1연에서 시적 화자는 '나와 너의 관계는 손이 닿으면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고 하며 서로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상태를 서언한다.

너(인식의 객체- 꽃: 존재의 본질탐구 대상)의 본질에 대해 알려고 하면

나의 무지함으로 인해 까마득한 어둠(도저히 알 수 없는 상태)이 된다.

 

2연에서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없이 피었다' 진다고 하며

인식의 대상이 되는 너의 존재의 불안정성을 관조한다.

존재의 본질을 밝히지 못하는 슬픔이 무명(無名)의 어둠(존재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 추억(追億)(존재 본질을 규명하려는)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무명의 어둠을 극복하려는 노력) 나는 한밤내 운다.

(본질 추구의 몸부림=슬픔과 고통)

 

3연과 4연을 통해 '나'는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려 애를 쓰고 본질을

탐구하려는 노력이 지속된다.

5연에서 '--'로 긴장감을 유발하면서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존재의 본질.)라고

존재본질 규명에 실패한 안타까움으로 시상을 마무리함으로써

본질규명의 불투명성과 회의감을 강조한다.

 

*

 

 

능금/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愛撫)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2004

 

1연에서 과일인 사과를 마치 사람처럼 의인화하여 표현했다.

즉 대상을 인격적 존재를 지닌 대상으로 의인법을 활용한다.

그리움은 능금을 익게 만드는 힘이란, 과일의 살과 과즙으로

더 밀도있데 채워저 익는 것 처럼 그리움은 능금 내부에 속살을 

채우고 싶은 열망과 과즙으로 만들고 싶은 갈증처럼 우리 자신을

성숙하게 만들고져하는 바람처럼 그리움은 사람을 익게 만드는

힘으로 제시된다. 익는 다는 것은 성숙한다는 것으로 그리움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내면적 성숙함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되고

, 잘 익은 능금이 향긋한 냄새를 풍기 듯 , 내면적 충실함이

충만해지면 ‘눈부신 축제’와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2연에서 과거, 미래, 현재가 등장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집착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아쉬운 자리인 현재는 온전히 충실하게 살아가지 못함을 말한다.

과거의 행실을 후회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만 생각하느라

헛되이 흘려보내는 현재, 그 현재가 어느새 과거가 되어 후회한다.

무수한 존재들이 이러한 삶으로 살아가지만 능금은 내적 성숙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보라’ 내용을 강조하고 시선을 집중시켜

이러한 능금의 모습이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행동이며

신의 은총을 받고 있는 훌륭한 모습이라 말한다.

 

 

3연에서 ‘존재의 본질’을 밝힌다.

‘꽃다운 미소’와 같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여 그것에 다다르면,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바다‘

가 있고 그 바다는 생명의 무한한 그리움이 존재하는 동시에 충만함이

있는 곳이다. 즉 내면의 바다는 존재의 본질을 의미한다.

능금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인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 1969

 

마르크 샤갈(1887~1985)은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파리에 와있는 나에게는 고향마을이 암소의 얼굴이 되어

떠오른다.

사람이 그리운듯한 암소의 눈과 나의 눈이 뚫어지게

마주 보고

눈동자와 눈동자를 잇는 가느다란 선이

종이로 만든 장난감 전화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본 시의 소재가 된 샤갈의 <나의 마을>은 화가 샤갈이

자신이 유년시절 체험을 자유롭고 몽상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시에서 샤갈의 마을은 실제의 공간이 아닌 환상의 세계로

눈은 순수하고 맑은 생명감의 역할을 한다.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돋은 정맥을 어루만진다.

새로 돋은 정맥 = 파란색의 이미지는 봄의 생명력

바르르 떤다 = 봄의 생명력이 꿈틀대는 것을 형상화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 . .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 수많은 눈송이들이 날리며 지붕과 굴뚝을 덮는 모습을

활유법으로 묘사

겨울 열매들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들고 = 메마른 겨울 열매들

에게도 생명력을 부여한다(봄의 생명력, 눈과 대비 강조).

밤의 아낙들 그해 제일 아름다은 ‘불’을 =  '아낙들' 토속적 표현

'불' 봄의 맑고 순수한 생명감(색채 이미지로 본 봄의 생명력)

을 아궁이(토속적 시어로 고향 마을을 떠올리게)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3월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삼월에 눈이 온다는 부분은 다소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절기상으로는 봄의 시작인데 눈이 온다고 함으로 모순적 상황이 된다.

따라서 샤갈의 마을은 비현실적, 모순적인 공간이 된다.

계절의 변화를 아낙들의 아궁이를 지피는 행위로 비유한다.

눈, 정맥, 올리브 빛, 불 등의 색감을 환기시키는 시어로 상황

효과를 더하고 정맥이 바르르 떠는  관자놀이에서 봄의 생명감을 

감각적 심상적으로 구체화 시켰다.

 

*

처용단장  / 김춘수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閑麗水道)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늑골(肋骨)과 늑골(肋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고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 <처용단장(處容斷章) 제1부(第一部) - 1의1> 전문)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 <처용단장(處容斷章) 제1부(第一部) - 1의2> 전문)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廻廊)의 벽(壁)에 걸린 청동시계(靑銅時計)가

겨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밤의 망또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 숭어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잠이 들곤 하였다. 

*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에는

호주(濠洲)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두화가 피어 있었다.

 

주(主)님 생일(生日)날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 <처용단장(處容斷章) 제1부(第一部) - 1의3> 전문)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軍艦)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海岸線)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 <처용단장(處容斷章) 제1부(第一部) - 1의4> 전문) 

 

겨울이 다 가도록 운동장(運動場)의 

짧고 실한 장의자(長椅子)의 다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겨울이 다 가도록 

아이들의 목덜미는 모두 

눈에 덮인 가파른 비탈이었다.

 

산토끼의 바보, 

무르팍에 피를 조금 흘리고 그때 

너는 거짓말처럼 죽어 있었다.

 

봄이 와서 

바람은 또 한번 한려수도(閑麗水道)에서 불어오고 

겨울에 죽은 네 무르팍의 피를 

바다가 씻어 주고 있었다.

 

산토끼의 바보, 

너는 죽어 바다로 가서 

밝은 날 햇살 퍼지는 

내 조그마한 눈웃음이 되고 있었다.

 

( <처용단장(處容斷章) 제1부(第一部) - 1의12> 전문) 1969

 

구성을 보면

1~ 4행 / 눈이 오는 순수한 정경 묘사/

5~ 6행 / 유년 시절에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의식이 일깨움

7~ 8행 /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심리적 삶의 의지

9~12행 / 눈 오는 정경 묘사

 

 심상의 특징은

언어들이 감각적으로 어울려 이루어내는 이미지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서술적 이미지로

특별한 관념이나 의미가 나타나 있지 않다, 단지 3월의 눈이라는 

그 사물 자체의 존재에 의해 이룩되는 심상만을 시적 대상으로 삼기에

존재의 시 또는 무의미의 시라고 한다.

 

처용단장이란 시는 1969년 부터 그 이듬해까지 1년에 걸쳐 현대시학에

연재되었던 13편의 연작시다.

신라 49대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 소재를 취했으나 작품 어디에서도

처용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작품의 배경도 고대가 아니라 현대이다.

난해한 시구는 강요해낸 말의 행진으로 무의미의 계열체로서의 무의미시다.

이 시는 언어와 언어가 두딪쳐 유발하는 미묘한 감각적 심상을 위주로

하고 있으면서도 객관적인 형태의 사실적 묘사를 위주로 하지 않음으로써

등장하는 사물들 간의 관계가 서로 먼 거리를 유지한다.

 

처용이라는 설화적 인물을 서정적 자아로 설정하고, 과거 어느 날

그 서정적 자아의 눈을 통해 바라본 , 3월의 남쪽 바다의 과거의 이미지를 

서술적 과거형으로 쓰고 있고 그래서 회상적 어법과 남쪽 바다라는

특정 지역의 제시를 통해 미묘한 향수, 그리움과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이  상

 

**

2024.5.12.  한바다.

'삶과 나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갓탤 매직 쇼  (0) 2024.05.29
강가에서  (0) 2024.05.15
새만금, 거짓말  (2) 2024.04.06
잡초를 관觀하다  (0) 2024.03.27
四時長春  (0) 2024.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