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나/나의 이야기

빈 들

haanbada 2024. 1. 11.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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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다.

지금은 노울 한 끝도 닿지 말아라

익은 벼 낫질에 밀려

다 떠나고

정으로 남긴 벼 그루터기 마져

파헤쳐진 들의 가슴엔

달빛 한 자락도 아프기만 하구나

뒤따르다 쳐진 바람 한 자락

어디선가 앓다 날아온 잡새 한 마리

그림자만 떨구고 날아가 버릴 때

다 떠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들은 눈을 감는다

영롱한 하늘 한 자락 끌어

몸을 덮고 싶지만

속속들이 와 안기는 건

차가운 어둠

메마른 나체로 드러누운

들의 가슴을 덮는 것은

서리뿐이다

서리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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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의 노래 " / 시인 :  신달자

**

 

시기적으로 한로寒露는 지났고

이제 상강霜降(10/23)을 맞이하겠지 상강이 뭔가 찾아보면

한로와 입동立冬 사이의 절기라고 한다

들판에 오곡이 무르익으면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을 거두어 가버린

텅 빈 들을 생각하게 된다, 뒤따르다 처진 바람 한 자락 과

잡새 한 마리가 떨구어버린 그림자가 머물러 있는.

 

작가 박경리 선생님은 토지를 통해

삶의 이중적 모순성을 보여 주 시는 데 우선적으로

土地는 대지가 아닌 帳簿의 표상으로 所有을 말하는 것으로

개인 間, 국가 간, 인간과 자연 간에

그것에의 욕망으로 인해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생태적으로 우리의 모든 삶도 이 大地 속에서

얽혀서 살아가야 하니까

세상에서 삶을 사는 모든 것은 힘들고 괴롭지만

어둠이 통해 밝음의 은혜를 알고

죽음이 있어 삶의 의미를 인식해 고통도 축복이 됨을

깨달으며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상관론적 사유로 보면

有無는 자연스러운 자연의 자기모습으로

무는 본체(体), 본성(性)을

유는 현상(相), 쓰임(用)을

보여주는 상관적 차연差延으로

(여기서 차연이란 差異와 延氣의 복합어로

상관적 차이나 상관적 사유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며

단독적인 개념이 아닌 대대적인 상관관계를 맺는

타자의 존재와 동시에 마주서있으므로

자기의 의미가 존립할 수 있다는 것)

노자의 無爲法에서 有란 非常道로

연기법적 존재 방식인 相生 相形으로 보여지는 데

이는 유식법으로 보면

제7식인 말나식(자아)인 집착심과 분별심으로 보여지는

相과 같다고 하겠다.

 

無爲自然 사상은 인간의 본능의 자연적 욕망(慾 ,ego)을

본성의 자연적 욕망(無慾)으로 回心시키기 위해 無爲之治를

제시한다.

즉 自然( 스스로 이와 같음)의 常道( 생하되 소유않고 도와 주되

주재하지 않는 )와 같은 無( 있지만 없는 듯한)를 닮은

허심자조虛心自照하면 본능의 소유욕이 본성의 존재론적 욕망으로

전환되면서 마음이 자연의 사실과 일치하는 심물합일心物合一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심물합일은 인간의 마음이 虛心의 無로 복귀한다면

그런 합일이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백( 空, 虛, )의 진리에 대해 노자 도덕경 42장에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라고 했다

(沖은 비다, 공허하다, 가운데, 중간을

和는 알맞다, 화합시키다, 담그다 , 바꾸다 의 의미로 쓰임)

즉 존재론적 입장에서 자연 그 자체인 陰陽은

不二 이므로 하나이고 不一 이므로 둘이다.

자생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연생으로 서로 상관적이다

그런데 상관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이에 음과 양을

분리시키며 동시에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연속과 불연속의

이중성을 가능케 하는 빈틈(虛空)이나 경계가 필요한데

沖충이란 그런 사이의 틈이나 허공을 말하며 이로서

음양은 三을 生시키고 그 三과 共生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다양한 존재방식을 가능케 하고

자연의 질서를 통해 모든 것을 다 원만 성취케 하는

공덕이 되는 보시의 근원이 스스로 비어 있는 자연의

허공이라는 것이다

 

45장에서는

大成若缺 其用不敝 大盈若沖 其用不窮 

대성약결 기용불폐 대영약충 기용불궁

 

큰 성취는 결빕과 같고 그 쓰임은 낡지 않으며

크게 충만한 것은 비어 있는 것 같고 ,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자연의 도를 언급하며 그것을 인간의 마음으로 옮기면

어떻게 轉用되는 가를 보여 준다.

자연이 大成으로서의 원만성취 공덕은 곧 자연 스스로가

결핍되어 있는 비어있음의 空 과 다르지 않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비어있음이 자연의 모든 것들을 성취시켜 주는

報施보시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허공이 만물의 존재방식을 가능케 하듯이

인간의 虛靜한 마음도 만물의 허공처럼 다양한 만물의

상관관계들의 공존을 허용해주고 中正중정의 도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알려 준다.

 

노울 한 끝 / 달빛 한 자락 / 영롱한 하늘 /

처진 바람 한 자락 / 잡새 한 마리의 그림자 /

파헤쳐진 들의 가슴 / 안기는 건 차가운 어둠 /

메마른 나체들의 가슴을 덮는 것은 서리뿐 /

 

詩人의 빈들의 노래를 감상하기 위하여

무위로서의 沖 과 연기적인 空을 살펴봤다

풍요로운 들녘도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그냥 그렇게 무심한 마음으로 겨우내 자신을 텅

비워버린다 이것이 가을들녘의 자세와 마음이다.

아프다는 것은 스스로 살아 있음 확인하는 것으로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부질없는 생각들을 비워

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눈물겨운 마음자리가 스스로

빛나고 샘물처럼 들의 노래가 솟아오르지 않을까.

 

*

말나식
불교는 固定的,實在的 自我의 存在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물론 유식사상도 무아사상의 선양이 궁극적 목적이다. 

우리는 자기의 육체와 정신의 활동을 보고 육체와 정신이 통일되어

이곳에 자기의 실재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유식은 비록 실재적 자아가 존재하지 않지만 假說을 세워

자아가 있다고 보고, 자아란 무엇인가를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근원적인 자아의식을 발견하는데 이것이 俱生의 我見인 第七末那識이다.
말나식의 말나에 대한 원어는 Manas이고 이것은 man(생각하다)의 名詞形이다.

이것은 '思量' 으로 번역되듯이, 일반적으로 대상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의미한다.
그런데 제육 의식을 'Mano-vij  na'라고 하여 똑같이

'man'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제육 의식과 구별하기 위하여 보통 '末那'· '末那識'·'第七末那'

또는 단지 '意'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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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13

2024.1. 10.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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