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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중심 우리 가요 이야기 ]
한류와 케이팝을 주도하는 음악을 한국 대중음악의 전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대중음악이 현재 시제가 중요하더라도 현재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현재완료의 결과물이다.
마치 오래 지속되어온 풍화물의 퇴적으로 삼각주가 형성되는 것처럼 오래전부터
다양한 아티스트들에 의해 오늘날의 케이팝을 잉태했다.
그 음악은 어느덧 유산이요, 그 주체는 레전드가 되었다. K-Pop이 그동안
미국의 것, 유럽의 것, 라틴의 것, 일본의 것을 부지런히 받아들였던 영향도
있지만, 이전에 존재하던 우리 음악이 세월이 흐르면서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만들어낸 산물이라고도 생각한다.
우리 대중음악은 1990년도에 들어설 쯤엔 이미 크게 트로트, 스탠더드, 포크
그리고 록이라는 커다란 네 덩어리의 장르로 분류되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장르에는 뛰어난 창의성으로 독자적인 표현의 세계를 일군
선구자들이 있다.
이 이야기는 그 전설적인 인물들의 인생 단편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치열한
음악적 자세를 돌아보는 것으로 출발한다.
1. 영원한 우리의 전설
△ 이미자 엘레지의 여왕
1964년 전국 방방고고에 울려 퍼진 ‘동백아가씨’ 이 한 곡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리움과 외로움 그리고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 그 시절 여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키워드들이 이 곡에 축약되어 처절하게 녹아 있다.
일터로 나간 남자들을 위해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인내하던 여인의 눈물과
한숨이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백아가씨> 1964
1941년생인 그녀는 실재 열아홉 살 나이에 부른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해
1990년까지 2000곡이 넘는 곡을 불렀다.
한국 기네스북에 2070여곧을 올리며 가장 많은 노래와 앨범을 출시한 가수로
자리매김 한다.
< 섬마을 선생님 > 1966
< 여자의 일생 > 1968
△ 신중현 한국 록의 대부
2011년 초반 신중현의 노래를 다루고, 실제로 그가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담긴
TV 광고가 방영된다. 불후의 명곡 <미인>이 아이들을 위한 동요로, 어르신을 위한
판소리로, 세계적인 록 오페라로 다양하게 편곡되어 불리는 내용이었다.
<미인>뿐인가 <빗 속의 여인>, <커피 한잔>, <님은 먼 곳에> 등 신중현이 쓴 많은 곡들이
그의 천재적인 역량에서 비롯된 산물들이다.
한국과 서구의 감정의 드라마틱한 결합은 몰론 탁월한 곡 진행은 수십년이 흐른 지금도
대중과 전문가들의 감탄사를 부른다고 한다.
< 미인 > 신중현과 엽전들 1974
< 빗 속의 여인 > 1964
< 님은 먼 곳에 >
△ 남진 과 나훈아 전국을 삼킨 라이벌
국내 대중가요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라이벌전은 무엇이었던가.
언제든 인기와 파워를 겨루는 경쟁자들이 있지만 팬들마저 가세한 라이벌전으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까지 전국을 뜨겁게 달군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전에
비교되는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전 세대와 전 계층에 걸쳐 이루어졌다.
남진과 나훈아는 모든 것이 대조적이었다.
부잣집 도련님 같은 외모의 남진은 당대 영화배우들도 부러워할 얼짱 꽃미남이었고
나훈아는 소도둑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남성적이었고 서민의 풍모에 믿음직한 느낌을
주었다. 남진은 대체로 젊은 여성 팬이 많았고, 나훈아는 어른과 남성들이 좋아했다.
시간이 흘러 나훈아가 기성세대의 사랑을 장악하면서 남진보다 한 수 위의 중량감을
갖는 국민가수로 가요계의 레전드로 상승했다.
< 님과 함께 > 1972
<머너먼 고향> 1971
△ 튜윈폴리오(윤형주 송창식) 탁원한 듀오 , 빛나는 솔로
트윈폴리오는 듀오가 아닌 3인조 트리오로 시작됐다.
서울 무교동의 음악 감상실 세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이란 코너의 사회를 맡은
이상벽의 소개로 청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 송창식은 팝 음악을 자유자재로
소화한 윤형주의 솜씨에 반해 윤형주, 이익근을 포함해 트리오를 결성하고 제안한다.
그러나 몇 달 후 이익근은 군 임대로 둘 만 남게된 둘은 팀명을 트윈폴리오로 하고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 때가 1968년 2월 이었다.
1960년 말 활동을 시작한 윤형주와 송창식의 트윈폴리오는 윤형주의 낭만적
미성과 송창식의 우렁찬 쾌음이 결합해 절묘한 하모니를 빚어낸 팀이 었다.
< 사랑의 기쁨 > 1970
△ 정훈희 해외가요제를 석권한 한류의 시작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정훈희는 비음이 섞인 미성으로
가요계를 수놓은 국내 최고 인기가수였다.
특히 국내 대중음악이 안방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 일본 도쿄, 그리스, 칠레 등
숱한 국제가요계에서 입상하면서 국위를 선양한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5년 칠레가요제에서는 <무인도>로 3위 입상과 최고가수상을 동시에 받았다.
< 안개 > 1967
△ 양희은 우리는 참 달게도 또 쓰게도 살았다.
2011년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 올랐던 <어디까지 왔니>는 양희은 음악의
품은 서정성과 시대성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압축한 휴먼 뮤지컬이었다.
우리 국민이 기꺼이 양희은과 그녀의 노래에 긴 생명력을 수여한 것도 시대정서든
인감미든 변치않는 진실함 때문이라 본다 <아침 이슬>.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제 노래가 우리 세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무언지 모를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어 주고 쓰라린 마음을 해소해 주었다고 봅니다.”
< 한계령 > 1985
△ 이장희 모든게 달랐던 기인
그이는 달랐다. 1970년대 초중반에 빨간 가죽 재킷을 입고 담배를 물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 것부터 격식과 틀을 강요하던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가장 달랐던 것은 노래였다.
이장희 노래는 누가 들었어도 잘 하는 노래, 뛰어난 보컬이라 할 수 없다.
솔직히 이런 건 지금도 결코 만만치 않은 감각이라 할 수 있다.
결정타는 시건방지게도 콧수염을 길렀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시절 어른의 눈에는 삐딱한 반항의 잚으오 비쳐졌지만 유신이란
이름의 군사독재시대의 숨 막히던 청춘들은 그로부터 자유와 일탈의
쾌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은 가창력이 아니라 음악이 주는 그만의 각별한 분위기,
은밀한하고 불길하면서도 틀을 바차고 나와 실제와 맞닿은 자유로운 느낌에
있었다
젊은 세대는 이 유사 리얼리즘에 공감하고 호감이 발동했다. 어딘지 모르게
호방하고 일정 부분 불길한 그의 보이스 톤도 이란 인상에 한몫했을 것이다.
< 그건 너 > 1973
<한잔의 추억> 1973
2. 반티지Vintage k-pop 아이콘icons
△ 조영필 자기혁신으로 등극한 가왕
조영필이 음악관계자들과 대중 모두로부터 가왕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를 보면
우선 그의 전성기라고 할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
존재하고 있던 모든 음악스타일을 통합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떠오르기 전 애트킨스, 김트리오, 조영필과
그림자 등의 여러 밴드를 거치며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했던 그는 록 음악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이다.
록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단발머리>는 1980년대 초반 서구의 트랜드였던
뉴웨이브 스타일을 시도했고, <창밖의 여자>,<그 겨울에 찻집>은 팝 발라드였다.
그에게 영광을 안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위시해서 <허공> 등은 트로트였다.
이러한 다양성은 모든 장르를 건드렸다는 형식주의적 터치가 아니라 하나의
곡에다 여러 장르의 스타일을 섞어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할 것이다.
이처럼 그는 모든 음악을 포괄하여 자신의 독자적 스타일로 확립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 즉 젊은이 들의 감각과 트랜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당대의 사랑받는 음악을 놓친 적이없으며, 앞서가는 음악을 알기 위해 오래도록
AFKN을 청취해 왔으며, 지금도 젊은 밴드와 가수의 음반을 듣는다고 했다.
<창 밖의 여자> 1980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1986
△ 산울림 청년 스피릿
산울림 삼형제의 아버지는 미8군 군속 설계사였고, 맏형 김창완과 창훈과 창익
두 동생들은 모두 두 살 터울이다.
삼형제가 음악으로 뭉친 것은 1970년대 초반, 김창완이 대학생이 되어서였고
셋은 이때부터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드럼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산울림이 거의 1년마다 정규앨범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렵 많은 곡들을
김창완이 이미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1976년 군 제대 후, 김창완은 취직이냐 음악이냐의 갈림길에 섰지만 결국 음악을
선택한다. 대학생들의 관심이 쏠린 MBC <제1회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고 싶었지만
이미 대학을 졸업했기에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대 캠퍼스 밴드였던 센드페불스에게 김창훈이 써준 <나 어떡해>가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이들의 가능성은 커졌고 서라벌레코드사와 음반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12월에 발표한 앨범이 대박을 치게되고 첫 앨범이
말 그대로 돌풍을 일으킨다.
< 아니 벌써 > 1977
<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 1978 김창완 밴드
△ 사랑과 평화 대중가요에 도전한 펑키 록
지난 1978년 늦가을에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가 길거리 스피커와 라디오를
수놓는 센세이션을 일으켯던 것은 트로트와는 전혀 다른 외국 밴드에게서나 볼 수 있는
펑키 리듬으로 달리는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펑크는 사실 웬만한 연주력과 그루브가 동반되지 않으면 구사할 수 없는 스타일이다.
사랑과 평화는 탈트로트의 서구적 지향에다 그룹사운드와 업소활동으로 오랫동안 다져진
능란한 실력으로 그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펑크를 무대에 이식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최이철, 시르보(이남이, 베이스), 김태홍(드럼), 김명곤(건반), 이근수(건반) 사랑과
평화 다섯명 맴버들의 연주 기량은 마치 외국 밴드처럼 탁월하고 놀라웠다.
리더인 최이철은 능숙한 펑크 그루브를 선사하면서도 너무도 편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에 의해 한국의 대중가요는 펑키 록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넘보게 된다.
< 한동안 뜸했었지 >
<청바지 아가씨> 1981
△ 심수봉 트로트의 힘
<대학가요제>가 최고의 인기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을 지난 1978년
2회를 맞은 <MBC 대학가요제>에는 어울리지 않게 흰 블라우스에 검정치마를
입은 한 여학생이 나왔다. 이름은 심민경으로 곡은 트로트 기운이 완연한
< 그 때 그 사람>이었다. 당장 다음날 전국의 대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 노래 참 특이했다”,“대학가요제에 웬 뽕짝이야”하며 소근 거렸다.
화제의 주역은 대상이나 금상 수상자가 아니라 평범한 여학생 , 그러나 심민경에
집중된 대중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는 대학가요제 직후 거액으로 지구레코드사
와 음반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곧 이름은 심수봉으로 바뀐다.
< 그 때 그 사람 > 1978
음반계약 이후 1979년에 정식 앨범을 발표해 <그 때 그 사람>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그토록 열망했던 스타덤 행진이 탄탄대로로처럼 보였던 시점 1979년 10월
26일 청천벽력의 사건 박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한다.
< 사랑밖에 난 몰라 > 1987
심수봉은 거창한 테마나 고매한 메시지가 아닌, 어디까지나 우리 정서 저변을
울리는 남녀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녀의 인기 요인을 논함에 있어 하늘이 내려주신 비음이라고도 하는 간드러지면서도
구성진 비음과 바이브레이션 그리고 조금은 불규칙한 호흡이라는 가수로서의 각별한
재능은 절대적이다. 음색의 개성 측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김수철 작은 거인
1984년 아버지가 음악 하는 것을 반대하는 바람에 마지막 음반에서 <못다 핀 꽃 한 송이>
<내일>이 대박을 치면서 그는 음악을 그만두려는 결심을 접어야 했다.
그 해 연말의 KBS 최고가수상, MBC 10대 가수상을 비롯해 언론이 주는 상만 16번
받을 만큼 당대 최강 조용필이나 이후 서태지가 부럽지 않은 수퍼 스타덤에 오른다.
그는 작은 거인으로 통한다. 체구는 작으나 거목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1978년에
결성한 밴드명이 작은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국악, 즉 우리 전통음악 쪽으로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그의 음악의 출발점은 강력하고도 변화무쌍한 록이지만 애초부터 국악 풍의 음악에
깊은 관심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김수철의 진정한 면모는 여기서 시작된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히트 가요를 써낼 수 있는 충분한 음악한가지만 잘해야 본전인
국악에 그것도 돈까지 잔뜩 써 가며 투신한 것이다.
그가 남긴 1987년<대한민구 무용제 연주앨범>, 1989년<황천길>, 그리고 1993년
영화음악 <서편제>는 한국 대중은악사의 금자탑으로 기록된다.
< 내일 >
< 서편제 > 서편제 OST 천년학
3. 고인이 된 우리의 예술가
△ 배호 혼으로 노래한 가수
비 전문 가수라고 할 만큼 우울과 처량함의 정서에 집중된 것은 아무래도
당시의 작사가들이 비와 배호 이미지의 어우림을 포착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돌어가는 삼각지>와 <안개 낀 장충당 공원>을 내리 대박히트를 친다.
1967년에 그는 이미 신장염을 앓고 있었다. 사실상 중환자였던 것이었다.
그랬으니 음색이 정상적인 사람과 같을 리 만무했다.
고통을 씹어 삼키는 듯 애절한 톤, 가늘고 구슬픈 통곡, 심금을 울리는 비탄조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한 호소력은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음색과 더불어 배호의 특징은 넓은 음역이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로 그가 저음역대에서 중후함을 자랑한 것이 사실이고
사람들이 배호를 모방하게 되면 주로 그의 저음에 타킷을 맞추었다.
광복군의 아들로 중국 산동성에서 1942년 배만금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음악가 집암인 외가의 혈통을 이어받아 어릴적부터 노래에 제주를 보였고 MBC
초대 단장이 된 외삼촌 김광빈으로부터 드럼과 노래를 배웠다.
< 돌아 가는 삼각지 > 1967
< 안 녕 > 1971
< 파 도 >
△ 김정호 독보적 감성의 포크 작가
1970년대 초중반 국내 포크의 전성기를 장식한 그는 천재라는 찬사가 조금도
과장이 아닌 독보적인 음악가였다.
한편의 단편 소설을 연상시키는 스토리 송 <이름 모를 소녀>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한 번 듣고도 이 곡이 지닌 매력에 흡수되었다.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숨쉬기조차 버거워 녹음할
당시 끊고 다시 부르고 또 끊고 부르고를 반복하다가 무려 5개월이마 걸려
완성시켰다 한다. 김정호는 결국 2년 후인 1985년 11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1952년생으로 33살 젊은 나이였다.
< 이름 모를 소녀 >
< 하얀 나비 > 1975
△ 김광석 진실한 독백
김광석의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음에 실린 처절하게 이지러진 한 사람
아니 우리 모두의 진실한 독백이다. 그렇기에 그가 전달하는 노랫말은 잊히지 않고
끝없이 마음속에서 그리고 입으로 중얼거리며 되새김질하게 된다.
김광석의 노래는 슬럼프가 없다. 어떤 트렌드가 생겨나고 어떤 새로운 음악이 판을
쳐도 인간적 숨결이 흐르기에 그의 노래를 지속적으로 소환한다.
1993년 리메이크 앨범<김광석 다시 부르기>의 속편인 1995년 <김광석 다시 부르기 Ⅱ
>가 발표됐던 무렵 그는 거의 포크의 영웅이었다. 포크의 죽음이 공공연히 거론되던
시점에서 포크음악의 질긴 생명력을 입증하며 받은 타이틀이 '포크의 위대한 생존자'다.
또한 그의 노래는 현실의 부조리와 부패를 건드리는 리얼리즘 경향이 없었음에도
일각에서 비판적 성향의 포크의 계승자로 일컬었다.
<나의 노래>에서 말하듯이 노래는 김광석의 힘이자 삶이었지만 1996년 1월 급작스런
죽음과 함께 음악인생은 서른둘로 끝났다. 하지만 죽고 나서도 그의 음악 중력은
요지부동이었고, 어쩌면 생전보다 더 승격된 레전드로 거듭났다.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외 베스트 명곡 10선
< 먼지가 되어 > 1996
< 사랑했지만 > 1991
4. K-POP의 영광
△ 이선희 멘토가 되다.
단순히 노래 한 두 곡만이 아니라 가수 자체에 대한 대조명이 이루어진다.
1980년대 음악계의 강자 이선희<위대한 탄생 2>에서 멘토로 분하면서 새삼 강한
호소력과 존재감을 드러냈다.
가히 돌아온 이선희다. 이 프로에서 그녀가 한 충고와 조언은 출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청자들에게도 상당한 감화력을 발휘했다.
따끔한 지적을 하면서도 동시에 장점을 부각해 감싸 안는듯한 말투와 내용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대목에서 이 시대 멘토의 조건과 자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취업과 현실에 볼모 잡힌 불안한 청춘들은 교과사의 위인, 위압적인 영웅
신비로운 인물을 원치 않는다. 성공한 사람으로 충분히 동경할만한 사람이어야
하지만 자신을 다그치는 권위적인 초상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인간적인 성품이어야 한다.
1984년 , 지금은 없어진 <MBC 강변가요제>에서 <J에게>라는 곡으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한 그녀는 그 시대가 요구했던 우렁찬 소리의 대명사였다.
이선희가 갖는 멘토의 조건은 근사하다. 무엇 보다더 이선희는 1980년대
대중음악계를 가장 화려하게 보낸 톱 가수이다 여자 국가대표 가수였다.
전성기 시절의 이선희의 팬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노래도 노래지만 남자들은 안경을 낀 귀여운 얼굴에, 여자들의 치마를 입지
않고 바지만을 고집하는 당당한 태도에 끌여들어갔다.
< J에게 > 1988
< 인 연 > 2005
△ 이문세 팝을 이긴 발라드
이문세는 MBC 라디오 프로 <별이 빛나는 밤에> 진행을 맡고있던 1985년
갑작스레 최고의 가수로 점프했다.
이전 두 장의 앨범이 실패한 뒤 작곡가 이영훈과 콤비를 이뤄 그해에 발표한
3집 앨범에서 <난 아직 모르잖아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 하나로 부족했던지 <할 말을 하지 못했죠>,<소녀 >, <그대와 영원히>등이
내리 라디오를 석권했다.
1987년 4집 역시 <사랑이 지나가면> 그리고 고은희와 듀엣으로 부른 <이별이야기>
를 비롯하여 <가을이 오면>, <굿바이>, <그녀의 웃음 소리뿐> 등 불별의 히트곡을
쏟아 냈다.
이문세의 수려한 팝 발라드가 나오기 전까지 음악 팬들은 팝을 들었다.
그들은 빌보드 톱 40 순위를 줄줄 꿰거나 아니면 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에
심취해 서구음악만 파고 들었다. 가요는 음악 취급도 하지 않았다.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와 <할 말을 하지못했죠>가 나온 1985년을 기점으로
마침내 팝에서 가요로!의 대역전이 시동을 걸었다. 서서히 라디오도 가요프로로
중심을 이동했다. 이문세의 공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 난 아직 모르잖아요 > 1985
<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 2015
△ 변진섭 팝 발라드의 최고점 밀리언셀러
돌이켜 보면 1988년 여름부터 1990년 겨울까지 적어도 2년반 동안 한국
사람은 음악매체를 통해 오로지 변진섭의 노래만 들었다.
이 시기 방송사와 신문사가 주최하는 최고가수상은 모조리 변진섭이 독차지
했다. 귀엽고 사람좋은 외모는 대중적 인기를 한층 부채질했다. 별명이 아기
공룡 둘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국민적 사랑을 누렸고 또한
탤런트 최진실과 연인 사이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최고의 커플로 매스컴을
만끽했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이문세가 등장하면서 한국 대중가요 시장을
주도했던 장르인 팝 발라드의 정점을 찍었다.
< 너무 늦었잖아요 > 1089
< 우리 사랑이 필요한 거죠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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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서적
가수를 말하다. 2012 임진모 빅 하우스
2024. 11. 09. 한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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