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나/미술 관련 27

긍재 김득신의 작품 감상하기

** * * 1. 생애 영조 30년(1754년)에 태어나 순조 22(1822)년까지 살다간 화원 김득신金得臣은 본관이 개성開城이고,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초호는 홍월헌弘月軒이다. 대대로 화원(畵員)을 하여 유명한 개성 김씨 가문은 곡산 노씨(谷山盧氏), 신평 한씨(新平韓氏) 등의 여러 화원 가문과 혼인을 맺으며 그들 가문 사이의 네트워크를 확장시켜 갔다고 본다. 아버지 김응리(金應履)는 화원은 아니었지만, 신평 한씨 가문의 화원 한중흥(韓重興)의 딸과 혼인하였다. 외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복헌復軒 김응원(金應煥)가 당대의 유명 화원이었던 점은 김득신, 김석신, 김양신 삼형제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화원으로 첨중(僉中)을 지낸 한중흥(韓重興)의 외손자이며, 김홍도의 선배로 알려진..

추상화의 선구자, 힐마 아프 클린트

** ** * 힐마 아프 클린트는 현대미술사에서 이루어진 재발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의 당사자였다. 2018년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힐마 아프 클린트 회고전’은 개관 이래 최다 관객수인 60만명을 기록한다. 교과서에도 미술사 책에도 나오지 않는 화가의 전시장에. 전시 도록은 미술관에서 가장 많이 팔린 도서가 됐다. 2019년부터는 아프 클린트의 그림이 뉴욕 현대미술관의 신소장품 전시관에 대여 작품 형식으로 전시되며 미술사의 아웃사이더가 일약 스타로 도약했다. 칸딘스키, 몬드리안, 말레비치보다 추상화를 먼저 시작한 스웨덴의 여성 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는 그전까지 기존 미술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아프 클린트의 이례적인 그림은 미술관을 찾아온 미래 세대에 의해서야 널리 공유되고 ..

구스타프 클림트의 미술세계

** * * 1.생애 19세기말 20세기초 오스트리아의 유겐트양식(Jugendstil, 장식미술양식) 운동을 대표하는 화가로 클림트는 아르누보와 상징주의 영향을 받아 황금빛의 화려한 화면과 풍부한 장식성을 추구하며, 강렬한 여성의 이미지를 창조한 예술가이다.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 바움가르덴에서 태어났다. 19세게 말 도시개발사업으로 링 슈트라세가 될 주변지역으로 보헤미안적으로 빈에 이주해 온 가정의 7남매 중 둘째인 장남으로, 오페라가수가 꿈인 전직 가수인 모친과 직업적으로 성공을 못거든 조각가이며 금 세공업자인 다혈질 부친을 둔다. 어린시절 세계경제불항(1873-96)영향으로 경제적 타격을 받아 화가는 가정의 매우 궁핍한 생활로 인해 14살 되던 해에 다니던 학교마져 그만두게 된다. 다행이 1..

한옥 감상

** ** 남산 한옥마을 한옥건물을 예로 들었습니다. **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이 있는 남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필동은 흐르는 계곡이 깊어 여름철 피서지를 겸한 물놀이 터로, 신선이 사는 곳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워 청학동으로 불렸답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경치 좋은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과 더불어 한양 5동으로 손꼽히는 곳이였습니다. 서울시는 시내에 산재되어 있던 민속자료 한옥 다섯 채를 이전 복원하여 1998년에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고 선조들의 생활모습을 조명할 수 있는 전통문화예술 공간으로 꾸몄습니다. 오늘은 전통가옥으로 보기에는 좀은 특이한 그려면서도 조선말기 명성황후의 15촌 조카, 평안감사, 여러 판서,그리고 한성판윤까지 역임했던 관훈동 민씨(민영휘)가옥을 살펴보면서 조선말 최고위..

석파 이하응의 묵란세계 감상

** * 석파 이하응의 묵란도 세계 고종제왕의 아비 대원군으로 알려진 석파 이하응(1820~1898)은 조선조 말 한 왕조(세도정치가 판치던)의 끝자락에서 와신상담하며 이산 정조대왕이 급거 후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으로 시작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집안들의 삼정을 문란케하는 권세 속에서 한 많은 세월동안 가난과 멸시를 이겨내고 신정왕후 조대비와 암약맺고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조선 제26대 왕으로 추대하게 함으로 수렴청정 배후 실세 대원군으로 관가개혁, 서원철폐 등 과감한 개혁을 통해 국정을 쇄신했으나, 서구문화 흡수장애인 쇄국정책과 왕권회복을 위한 경복궁 중건 등 격변기에 무리한 정책과 사업을 고집하여, 좁은 세계관, 열강의 간섭을 역량부족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또 고종의 개방정책에 맞서 권력 경쟁에 벌..

난초를 관하다.

** ** 1. 난초의 어원과 명칭 우리나라에서는 난화란 말보다는 난초라는 말로 많이쓰 인다. 매화, 국화의 명칭과 달리 난초라고 일컫는 것은 난은 꽃과 향기도 좋지만 , 그 잎이 사철 청정하고 수려한 데서 화가 아니라 잎을 강조하는 초를 붙여 쓰게 되었을 것이다. 란(蘭)을 한자로 찾아보면 은대의 갑골문자나 주대의 금문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한대의 에 비로소 나타난다. 이로써 보면 우리말로 난초 또는 난도 중국의 진대 이후 에서 유래된 말임을 알 수 있다. 蘭 자를 草(초)와 闌의 합성어로 쓴 것은 난이 식물이기 때문에 부수인 풀초 자를 난에 썻음을 알 수 있다. 闌의 聲符子(성부자)를 쓴 것은 글자를 만들기 전에 난이란 구어가 있어서 그 음을 나타내기 위해 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난에는 문 밖..

박수근 화백의 작품 감상

** 박수근의 작품 감상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한 화가의 작품을 잘 감상하려면 그 화백이 겪고 살아간 시대 상황, 동 시대의 회화적 주류 사조, 자신만의 기법과 화풍, 작품의 주요 대상, 그리고 그의 생활철학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된다. 특히 오랜 세월 비와 풍상을 겪어 색바랜 화강암에 새겨진 마애석불을 대면하는 것 같은 선묘가 상감화된 것 같은 화면을 대면하게 되면 더욱 더욱 그러하리라. 화가 박수근(1914~1965년)은 한일합방 후 치욕의 식민지 시대와 6.25 내전의 역사를 겪어서 절망과 실의로 한민족의 겪은 무력감과 가난한 농촌서민, 그리고 도시의 빈민가에서 고달픈 생활을 영위하는 서민생활의 답답함, 지루함, 그리고 체념적 분위기를 몸소 보왔다. 자신 또한 부친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보..

단원 풍속도첩

** * [ 단원 풍속화첩 ] 들어가며 풍속화란 원래 동시대의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상을 묘사하고 기록하는 예술로 주로 지배 계급층 보다는 피지배충의 생활을 주로 다루지만 이 계층과 밀접하게 연관된 지배계층의 생활도 자연스레 포함되기도 한다. 단원이 남긴 풍속화에는 대개 병풍과 '단원풍속도첩'처럼 첩이 형태로 되어 있있다. 총 25점으로 된 시리즈형 풍속도첩인 단원풍속도첩은 보물 제527호로 지정되어 이촌에 위치한 중앙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첩의 크기는 가로 세로 27cm x 22.7cm 이다. 여기에는 총 16점을 올렸는 데 그림을 감상하는 분들의 감상을 돕기 위해 몇가지 관상 포인트를 적어 본다. -. 작품 "서당", "무동"에서와 같이 판소리 장단처럼 형태가 다른 선의 굵고, 가늘어지기 그리고..

혜원 풍속화 전신첩

** * 풍속화 , 혜원전신첩 . 근역서화징이란 오세창이 1917년 편찬하고, 1928년 계명부락부에서 간행한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이 있다 324면의 국판으로 ‘국역’이란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수록된 서화가를 종합하면 신라시대부터 조선 철종까지 화가가 392명, 서가는 576명, 서화가는 149명으로 모두 1,117명라고 한다. 서예가인 오세창(1864-1953)의 부친인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당시 천죽재란 큰 서화의 수장고를 보유했던 예술품 수집가였다. 조선말기에 역관이었으며 기자 그리고 대한민보의 사장을 지냈던 위창은 예술적 분위기의 가문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서화에 대한 정보와 감식안을 두루 갖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편찬한 ‘근역서화징’ 에서 혜원에 대한 소개로는 ‘화사약..

오원 장승업 작품 감상

** 조선의 르네상스는 영조·정조 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조 때의 병자호란과 선조 집권 시 임진왜란이란 2대 전란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고 , 특히 정조임금은 규장각 기구를 통해 초계문신제도를 실시해서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신해통공, 서얼차별 완화, 서양 과학기술 등을 수용해서 왕국의 경제도 많이 부강해져 서민들도 문화생활에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고 유능한 정조임금이 갑자기 타계 후, 순조임금의 수렴청정을 비롯하여 세 차례의 수렴청정 등으로 외척의 득세한 세도정치로 인해 삼정이 문란해져 고종 때에 와서는 조선은 외세에 뿌리채 흔들리게 된다. 고종임금은 1873~1875년 3년간 개혁·개방정책을 단행했으니 아쉽게도 왕정정치를 고수한 가운데 아까운 인제들을 너무 많이 처단함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