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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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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숲” / 시인 강 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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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고속화 도로 좌우로 펼쳐지는 전철 구조물 과
운하 너머로 보이는 가로수와 숲이 생기를 머금고
초하를 노래하는 것 같다
영종교 다리위 도로옆 SOS 비상주차 틈새에 주차하고
멀리 끝없이펼쳐진 뻘톱과 섬들에 카메라 엥글을 마춘다
어제가 入夏라 그런지 스쳐가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현대인의 추구하는 아름다운 삶, 그리고 행복한 삶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것과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녀야할 아름다운 삶과,
행복한 삶과이 차이는 무엇일까.
IMF 경제통제 하에 우리경제가 매우 어려워졌을 때
나는 매우 단순한 생각으로 다가올 어려움을 예상했는데
지금도 자신이 현대인의 사고 측면에서 보면 한심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업규모가 축소되면 결과적으로 인건비 문제가 노사협의
사항에 가장 먼저 시급한 현안으로 등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유가 허락하는 사업체에서는 명예퇴직이라는
명목으로 섭섭지 않게 내보내겠지만 그렇치못한 업체에서는
현장 미투입 노동자들을 어떻게 하면, 딸린 식솔들을 고려해서,
무난히 처리할까 하는 문제였다.
정부와 전경련에서 취한 조치는 남아도는(?) 직원을 정리해서
놀랍게도 비정규직이란 노동집단을 만드는 일이 었다.
정부와 기업의 CEO 누구하나 가정을 파탄화 시키고 가장을
거리고 내몰고 국가경제를 어지럽게한 책임을 지지않았다.
도리어 정선된 CEO라 하여 이전보다 고액을 받게하였다
상대적으로 수백만 노동자는 감봉되어
부녀자, 노인까지 노동일선에 내몰더니,
금년에는 OECD 국가중 유아출산률이
최저라고 메스콤에서 야단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때 , 이런 고민을 했다
노조 측면에서는 일자리는 서로 유지해야 하고
기업측면에 서는 생산성이 상당기간 떨어지는 것을
보전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감봉을 감수하면
난국을 혜처 나갈 수 있을까?
이 경우에 정부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稅收감소를
고려하며 노동자와 기업들을 도와줄까 하는 ..
정부는 기업을 돕는다고 파트타이머(시간제 근무자)에
변형근무 시간제를 허용하니 이젠 정규직도 어렵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IMF와 이면계약에 예정된 결과라.
우리가 생각하는 소박한 이상향은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사랑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지향하는 정부가 운영하는
나라(國)라고 하면 과욕일까.
시간과 운송수단 면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허락되면
고요한 정적에 공간을, 잔잔한 갯바람에
묻어온 반가운 해초 냄새를 맡으며
부드러운 자연의 물결소리,
새소리가 들리는 해변을 걷는다
때론
저 멀리 보이는 섬들은 잿빛으로 침묵하고 있고
새들도 보이지를 않고 어두운 뻘밭
혹은
무거운 바닷물이 끝없이 펼쳐진 공간에는
황량함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현대인이 꿈꾸는 인간본연의 원초적인 삶이
포장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곳이라서 그럴까.
情有理無
정유리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아바타(avatar)란
사이버 상의 자아인 또 다른 나이다
이때 우리는
조물주 ,
나 ,
피조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아바타는 나의 피조물이면서 또 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육체란 몸(맘)에 의지해서 표현되는 존재이다
아바타는 우리의 몸(마음)과 기억의 실체로
그것에는 진정한 나는 없고
타자로부터 규정받을 뿐이다.
半有반유를 알기 위해서 ,
먼저 無를 가능한 정의해보자
모든 것이 시간에 의존하는 데
시간 없이 존재하는 것이 유일하게 무이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심적 풍경에 필수적인 조건인 반면
인지할 수 없으면서도
우리 삶 자체가 無인 것이다
그것은 이해의 정도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 있겠지만 ,
물리적, 인지적, 통계적으로
존재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가장자리도 없고
확실한 경계도 없고
출발점, 진입로도 없고
잡아둘 장소도 없지만
그것을 우리는 소리, 빛, 온도, 운동 등에서 觀한다.
半有를 사물 형성의 근원적인 힘이라고 하는 데
거부감이 별로 없다
질적인 면에서 보면
"반유란 불연속의 가능성
( 사물의 자기 부정성 = 소멸)과
연속의 가능성
( 시간성은 그 실재의 존재방식 = 지속)에
대한 지향으로서의
고정되지 않고 부단히 운동하는 점이다"
라고 정의되고 있다.
그렇다면 온전한 有란 없다는 의미인가
초자연적인 신비로움과
어머니 같은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는
잔잔히 수초들을 잠그고 있는 낮은 수위의 호수를 그려보자
조용히 바람에 몸을 맡기던
한 때의 물새들이 갑자기
힘차게 날개짓하며 날아 오른다고 하자
새들이 날아 오르는 순간
정적은 깨어지고 물방울은
사방으로 튕겨나가지만 ,
물이 새들을 붙잡지 않으니
호수는 금세 고요해진다
소리가 끈긴 자리(침묵)에서
우리는 무와 만나는 것이다
내면 깊숙이 경험되는 고요,
이 진정한 고요가 주는 긍정성, 명료성이
우리 자아에 대한 확신을 준다는 것이다.
침묵의 힘은 평화로 ,
외부세계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함,
언어(소리)가 끈긴 자리에는 진동만이 존재하는 데 ,
이 경험되는 고요가 정신에 영묘한 부동의 힘을 준다
그리고
물은 우리에게 떠남(無執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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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한바다 2023년에 다시보며